[권영상 작가님] 7층 할머니
[권영상 작가님] 7층 할머니
by 권영상 작가님 2021.10.28
7층 할머니가 이사 가신다는 말을 요 얼마 전에 들었다. 어머니 같은 분이 떠나신다니 섭섭했다. 같은 아파트 같은 줄에서도 알고 지내는 분은 그분뿐이다.
아파트 마당에 들어설 때면 할머니는 가끔 현관 앞 계단에 앉아 계시다가 아이쿠, 하며 일어나시곤 했다. 나이 먹은 모습을 보여드려 미안하다며 늘 안절부절이셨다. 여든넷. 하얀 머리에 옥색 블라우스, 그 위에 실로 뜬 조끼를 즐겨 입으셨다.
할아버지 계실 때엔 꼭 두 분이 함께 다니셨다. 하얀 양복에 중절모를 쓰신 할아버지는 항상 단장을 짚으셨다. 할머니는 늘 연로하신 할아버지 뒤를 따라 걸으셨다. 할아버지 걸음걸이를 살피느라 그러신댔다. 퇴근길에 만나면 나도 내외분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어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곤 했다.
“아유. 내 정신 좀 봐. 어여, 가세요. 지금 배고프실 텐데.”
그러시며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셨다.
하지만 말씀만이지 그 말씀을 금방 잊고 요즘은 어디가 아프고, 어느 병원을 다니고, 외국에 나가 사는 큰아들의 무심함을 탓하고는 하셨다.
그랬는데 잠시 못 뵈온 사이 할아버지 없이 혼자 다니셨다.
“할아버진 석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병원에서.”
그 말씀에 나는 저으기 당황했다. 같은 줄에, 그것도 불과 두 층 사이로 살면서 그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석 달이나 모르고 살았다는 단절감에 마음이 아팠다. 10여 년을 살면서 얼굴을 익힌 분인데 그렇게 소리 없이 가시다니! 그 일이 황망스러웠다.
그 후, 가끔 할머니를 뵈면 혼자 외롭게 다니셨다. 그래서 뵐 때마다 반가이 인사를 드렸고, 꼭꼭 안부를 여쭈었다.
요 한 달 전쯤이다. 동네 분수길에서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시는 7층 할머니를 만났다. 운동하러 나오셨다면서 부축해 주는 이가 셋째 아들이라 하셨다. 쉰은 되었음직한 분이었다. 사업에 실패해 혼자가 되었다는 그 아들인 것 같았다. 그 후 몇 번이나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분수길을 걷는 할머니를 뵈었다.
뭔가 얻어내고 싶은 속내가 있는 모양이구나, 했다. 남의 나라에 가 사는 아들은 남의 나라에 가 사니 그렇다지만 가까이 사는 아들이 이즈음에 나타나 어머니 운동을 시켜드리는 모습이 크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다. 바깥일을 보고 집에 들어가느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와 문이 열리면서 대여섯 분이 내렸다. 뜻밖에 7층 할머니도 함께 내리셨다. 나는 타려던 엘리베이터를 뒤에 두고 할머니를 따라 현관 바깥으로 나왔다.
“이사 가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내 물음에 대한 대답보다 먼저 함께 내린 분들을 소개하셨다. 여동생과 여동생의 남편, 그리고 그분들의 손자 둘을 소개하시고는, “이 분은 우리 아래층 국어 선생님.” 하고 나를 소개하셨다. 그러고 난 뒤에야 내 물음에 대답을 주셨다.
“이 집 팔어 셋째 아들 집 사주고, 저는 진주에 사는 이 여동생네로 가요.” 그러셨다.
잘 가시라며, 건강하시고 장수하시라며 모처럼 작별의 악수를 청했다. 내 악수를 받으며 할머니가 눈물을 글썽, 하셨다. 나는 몇 번이고 동생분 곁으로 가시기 잘 하셨다고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그렇지만 아들 셋을 두고 여동생네로 가신다는 할머니가 못내 안쓰러웠다.
아파트 마당에 들어설 때면 할머니는 가끔 현관 앞 계단에 앉아 계시다가 아이쿠, 하며 일어나시곤 했다. 나이 먹은 모습을 보여드려 미안하다며 늘 안절부절이셨다. 여든넷. 하얀 머리에 옥색 블라우스, 그 위에 실로 뜬 조끼를 즐겨 입으셨다.
할아버지 계실 때엔 꼭 두 분이 함께 다니셨다. 하얀 양복에 중절모를 쓰신 할아버지는 항상 단장을 짚으셨다. 할머니는 늘 연로하신 할아버지 뒤를 따라 걸으셨다. 할아버지 걸음걸이를 살피느라 그러신댔다. 퇴근길에 만나면 나도 내외분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어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곤 했다.
“아유. 내 정신 좀 봐. 어여, 가세요. 지금 배고프실 텐데.”
그러시며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셨다.
하지만 말씀만이지 그 말씀을 금방 잊고 요즘은 어디가 아프고, 어느 병원을 다니고, 외국에 나가 사는 큰아들의 무심함을 탓하고는 하셨다.
그랬는데 잠시 못 뵈온 사이 할아버지 없이 혼자 다니셨다.
“할아버진 석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병원에서.”
그 말씀에 나는 저으기 당황했다. 같은 줄에, 그것도 불과 두 층 사이로 살면서 그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석 달이나 모르고 살았다는 단절감에 마음이 아팠다. 10여 년을 살면서 얼굴을 익힌 분인데 그렇게 소리 없이 가시다니! 그 일이 황망스러웠다.
그 후, 가끔 할머니를 뵈면 혼자 외롭게 다니셨다. 그래서 뵐 때마다 반가이 인사를 드렸고, 꼭꼭 안부를 여쭈었다.
요 한 달 전쯤이다. 동네 분수길에서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시는 7층 할머니를 만났다. 운동하러 나오셨다면서 부축해 주는 이가 셋째 아들이라 하셨다. 쉰은 되었음직한 분이었다. 사업에 실패해 혼자가 되었다는 그 아들인 것 같았다. 그 후 몇 번이나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분수길을 걷는 할머니를 뵈었다.
뭔가 얻어내고 싶은 속내가 있는 모양이구나, 했다. 남의 나라에 가 사는 아들은 남의 나라에 가 사니 그렇다지만 가까이 사는 아들이 이즈음에 나타나 어머니 운동을 시켜드리는 모습이 크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다. 바깥일을 보고 집에 들어가느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와 문이 열리면서 대여섯 분이 내렸다. 뜻밖에 7층 할머니도 함께 내리셨다. 나는 타려던 엘리베이터를 뒤에 두고 할머니를 따라 현관 바깥으로 나왔다.
“이사 가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내 물음에 대한 대답보다 먼저 함께 내린 분들을 소개하셨다. 여동생과 여동생의 남편, 그리고 그분들의 손자 둘을 소개하시고는, “이 분은 우리 아래층 국어 선생님.” 하고 나를 소개하셨다. 그러고 난 뒤에야 내 물음에 대답을 주셨다.
“이 집 팔어 셋째 아들 집 사주고, 저는 진주에 사는 이 여동생네로 가요.” 그러셨다.
잘 가시라며, 건강하시고 장수하시라며 모처럼 작별의 악수를 청했다. 내 악수를 받으며 할머니가 눈물을 글썽, 하셨다. 나는 몇 번이고 동생분 곁으로 가시기 잘 하셨다고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그렇지만 아들 셋을 두고 여동생네로 가신다는 할머니가 못내 안쓰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