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 목사님] 뼈를 묻는 진심만은
[한희철 목사님] 뼈를 묻는 진심만은
by 한희철 목사님 2021.12.01
4년 전, DMZ를 따라 홀로 걸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다는 강원도 고성 명파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파주 임진각까지 열하루 길을 걸었지요. 허리가 잘린 그 길을 걸으며 이 땅이 어서 하나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폭염주의보가 날아드는 유난히도 더운 날, 한 마리 벌레처럼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다시 한번 걷자는 친구들의 제안은 무엇보다 고마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홀로 걸었던 걸음의 의미를 나누려는 마음으로 다가왔으니까요. 44년 전 신학을 같이 공부한 친구들과 함께 길을 나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서로가 바쁜 사람들, 열하루의 시간은 꿈과 같아 2박 3일간으로 일정을 정했습니다. “아니, 이 길을 혼자 걸었단 말이야?” 길을 걸으며 친구들은 자주 질문과 탄식을 했습니다. 함께 걷는 것도 막막하게 느껴지는 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져 내렸던 폭우와 우박, 머리 바로 위에서 벌침처럼 쏟아지던 천둥과 번개, 그 속을 걸어갔던 진부령이 그랬습니다. 내내 오르막길, 함께 걸어도 쉬운 길이 아니었지요.
일부러 찾아가 걸은 돌산령터널도 그랬습니다.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로 남은 도솔산전투가 있었던 곳입니다.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 보름여에 걸친 해병대의 공격으로 2263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지만 아군 또한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산악전 사상 유례가 없는 공방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터널의 길이가 2995미터,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폭격기가 지나가듯 굉음이 울려대는 터널을 40분에 걸쳐 걸었습니다. 차로는 4분이면 넉넉한 거리, 서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가는 것이 제대로 가는 것이라는 것과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평화의 댐, 불어대는 찬바람이 여간이 아니었습니다. 저 높이가 얼마쯤일까 궁금증이 일만큼 높다랗게 쌓아올린 콘크리트 벽, 그 벽을 두고 물은 저 아래 바닥을 채울 정도였습니다. 북한이 금강산댐 수문을 열어 공격을 하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63빌딩의 절반 높이가 물에 잠기게 된다고 수선을 피우던 모습이 기억에 선합니다. 방송도 신문도 난리였지요. 국민의 눈과 귀를 바른 곳으로 이끌어야 할 언론이 나팔수로 전락했던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그곳을 찾던 날은 그 일을 제안한 이가 세상을 떠난 날, 인생이 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댐 주변을 한 바퀴 돌던 우리는 비목 앞에 섰습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노랫말의 배경이 되는 곳입니다. 비바람 긴 세월에 철모는 녹슬었고 십자가 나무는 야위었지만 나라와 민족, 그보다는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이름 모를 계곡에서 산화散華한 젊은 넋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눈길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 했던 견고한 댐보다도 말없이 선 비목이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거짓과 허위는 가도, 뼈를 묻는 진심만은 영구히 남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을 다시 한번 걷자는 친구들의 제안은 무엇보다 고마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홀로 걸었던 걸음의 의미를 나누려는 마음으로 다가왔으니까요. 44년 전 신학을 같이 공부한 친구들과 함께 길을 나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서로가 바쁜 사람들, 열하루의 시간은 꿈과 같아 2박 3일간으로 일정을 정했습니다. “아니, 이 길을 혼자 걸었단 말이야?” 길을 걸으며 친구들은 자주 질문과 탄식을 했습니다. 함께 걷는 것도 막막하게 느껴지는 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져 내렸던 폭우와 우박, 머리 바로 위에서 벌침처럼 쏟아지던 천둥과 번개, 그 속을 걸어갔던 진부령이 그랬습니다. 내내 오르막길, 함께 걸어도 쉬운 길이 아니었지요.
일부러 찾아가 걸은 돌산령터널도 그랬습니다.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로 남은 도솔산전투가 있었던 곳입니다.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 보름여에 걸친 해병대의 공격으로 2263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지만 아군 또한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산악전 사상 유례가 없는 공방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터널의 길이가 2995미터,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폭격기가 지나가듯 굉음이 울려대는 터널을 40분에 걸쳐 걸었습니다. 차로는 4분이면 넉넉한 거리, 서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가는 것이 제대로 가는 것이라는 것과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평화의 댐, 불어대는 찬바람이 여간이 아니었습니다. 저 높이가 얼마쯤일까 궁금증이 일만큼 높다랗게 쌓아올린 콘크리트 벽, 그 벽을 두고 물은 저 아래 바닥을 채울 정도였습니다. 북한이 금강산댐 수문을 열어 공격을 하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63빌딩의 절반 높이가 물에 잠기게 된다고 수선을 피우던 모습이 기억에 선합니다. 방송도 신문도 난리였지요. 국민의 눈과 귀를 바른 곳으로 이끌어야 할 언론이 나팔수로 전락했던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그곳을 찾던 날은 그 일을 제안한 이가 세상을 떠난 날, 인생이 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댐 주변을 한 바퀴 돌던 우리는 비목 앞에 섰습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노랫말의 배경이 되는 곳입니다. 비바람 긴 세월에 철모는 녹슬었고 십자가 나무는 야위었지만 나라와 민족, 그보다는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이름 모를 계곡에서 산화散華한 젊은 넋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눈길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 했던 견고한 댐보다도 말없이 선 비목이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거짓과 허위는 가도, 뼈를 묻는 진심만은 영구히 남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