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소원
[권영상 작가님] 소원
by 권영상 작가님 2022.01.06
'언제나 내가 좀 미흡했구나, 할 때 새해가 온다. 올해도 그렇다. 새해라고 별안간에 내가 달라질 거야 없겠지만 마음을 새롭게 가지고 싶다. 그러기 위해 이맘쯤 마음먹은 소원 하나를 하늘에 말해본다. 누구나 바라고 원하는 그런 소원이다.
영화 속 제니도 이루고 싶은 소원을 말한다.
제니가 좋아하는 애덤스, 그는 그저 시시한 3류 화가다. 사람보다는 풍경화나 그리는 가난한 화가다. 사정을 아는 화상은 그림을 팔러 온 그의 처지가 딱해 한 점 사준다.
늦은 오후, 애덤스는 우연히 눈 내린 뉴욕 공원을 찾는다. 거기서 고풍한 옷과 모자를 쓴, 낯선 풍의 제니 애플턴이라는 소녀를 우연히 만난다. 소녀는 자신의 부모님이 햄머스타인 뮤직홀에서 마술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햄머스타인 뮤직홀이라면 없어진 지 오래됐는데…”
애덤스는 의아해했지만 제니는 어제도 부모님 공연을 보았다고 말한다.
눈으로 뒤덮인 막 어두워가는 공원은 점점 신비감에 휩싸이고, 제니는 이 야릇한 설경 속에서 애덤스를 향한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제니는 소원을 비는 놀이라며 발끝을 세워 한 바퀴 빙 돌고 난 뒤 말한다.
“제가 클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그런 말을 남기고, 희미한 잔명처럼 애덤스의 눈앞에서 문득 사라진다.
1948년에 제작된 윌리엄 디털리 감독의 영화, ‘제니의 초상’ 앞부분이다.
흑백 영화답게 테마 역시 단순하다. 컬러 영화가 인물간의 관계, 심리, 사건의 중층 구도로 관객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면 흑백 영화는 심플하면서도 나름대로 고상한 데가 있다.
서로 사랑하기에는 나이 차가 너무 큰, 아니 아직 소녀인 제니. 그들이 그 벽 아닌 나이의 벽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장치가 ‘소원 놀이’이다. 선 채로 한 바퀴 몸을 빙 돌리면서 제니가 빈 것은 가진 것도 없고,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처음 보는 이 화가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다. 그것도 자랄 때까지 기다려주기를 바라는.
원작자이며 소설가인 로버트 네이션이 그리려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만하다. 소녀와 가난한 화가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그 사랑을, 지금 여기 있으나 또한 없기도 한, 전혀 가 닿을 수 없는 비련을 통해 극대화시키려 한다.
실은 이 예쁜 소녀 제니는 이미 오래전, 풍랑으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는 우연히 환상의 몸을 입어 실제처럼 이 세상에 와 한 남자 애덤스를 사랑한다. 건널 수 없는 이쪽과 저쪽 세상의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이루려면 그 소원은 얼마나 깊고 아파야 할까.
어찌 보면 소원이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초자연의 힘에 의뢰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빌고 있는 소원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바라마지않는 것이다.
소원은 영원히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의 방향이다. 그것이 있기에 우리는 길을 잃지 않는다. 절망하거나 가던 길을 중도에 포기할 수 없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흔들리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소원을 간절히 바라는 힘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나도 제니의 소원 놀이처럼 한 바퀴 빙 돌면서 소원을 말했다.
“세상이 팬데믹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이룰 수 없는 소원으로 또 한 해를 버텨내게 될까 조금은 두렵다.
영화 속 제니도 이루고 싶은 소원을 말한다.
제니가 좋아하는 애덤스, 그는 그저 시시한 3류 화가다. 사람보다는 풍경화나 그리는 가난한 화가다. 사정을 아는 화상은 그림을 팔러 온 그의 처지가 딱해 한 점 사준다.
늦은 오후, 애덤스는 우연히 눈 내린 뉴욕 공원을 찾는다. 거기서 고풍한 옷과 모자를 쓴, 낯선 풍의 제니 애플턴이라는 소녀를 우연히 만난다. 소녀는 자신의 부모님이 햄머스타인 뮤직홀에서 마술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햄머스타인 뮤직홀이라면 없어진 지 오래됐는데…”
애덤스는 의아해했지만 제니는 어제도 부모님 공연을 보았다고 말한다.
눈으로 뒤덮인 막 어두워가는 공원은 점점 신비감에 휩싸이고, 제니는 이 야릇한 설경 속에서 애덤스를 향한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제니는 소원을 비는 놀이라며 발끝을 세워 한 바퀴 빙 돌고 난 뒤 말한다.
“제가 클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그런 말을 남기고, 희미한 잔명처럼 애덤스의 눈앞에서 문득 사라진다.
1948년에 제작된 윌리엄 디털리 감독의 영화, ‘제니의 초상’ 앞부분이다.
흑백 영화답게 테마 역시 단순하다. 컬러 영화가 인물간의 관계, 심리, 사건의 중층 구도로 관객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면 흑백 영화는 심플하면서도 나름대로 고상한 데가 있다.
서로 사랑하기에는 나이 차가 너무 큰, 아니 아직 소녀인 제니. 그들이 그 벽 아닌 나이의 벽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장치가 ‘소원 놀이’이다. 선 채로 한 바퀴 몸을 빙 돌리면서 제니가 빈 것은 가진 것도 없고,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처음 보는 이 화가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다. 그것도 자랄 때까지 기다려주기를 바라는.
원작자이며 소설가인 로버트 네이션이 그리려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만하다. 소녀와 가난한 화가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그 사랑을, 지금 여기 있으나 또한 없기도 한, 전혀 가 닿을 수 없는 비련을 통해 극대화시키려 한다.
실은 이 예쁜 소녀 제니는 이미 오래전, 풍랑으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는 우연히 환상의 몸을 입어 실제처럼 이 세상에 와 한 남자 애덤스를 사랑한다. 건널 수 없는 이쪽과 저쪽 세상의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이루려면 그 소원은 얼마나 깊고 아파야 할까.
어찌 보면 소원이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초자연의 힘에 의뢰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빌고 있는 소원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바라마지않는 것이다.
소원은 영원히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의 방향이다. 그것이 있기에 우리는 길을 잃지 않는다. 절망하거나 가던 길을 중도에 포기할 수 없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흔들리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소원을 간절히 바라는 힘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나도 제니의 소원 놀이처럼 한 바퀴 빙 돌면서 소원을 말했다.
“세상이 팬데믹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이룰 수 없는 소원으로 또 한 해를 버텨내게 될까 조금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