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 목사님] 물은 왜 100도에서 끓을까
[한희철 목사님] 물은 왜 100도에서 끓을까
by 한희철 목사님 2022.01.19
마주 앉아 저녁을 먹던 아내가 생뚱맞은 질문을 했습니다. 물이 왜 100도에서 끓는지를 아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런 관심을 가져본 일이 없었거니와 내 식으로 한다면 “뜨거우니까 끓겠지.” 혹은 “더 이상은 못 참겠으니 끓는 거겠지.”라는 대답이 어울리지만, 아내는 물리를 공부한 사람입니다.
최대한 물리학적인 소양을 담아 대답을 해야지 할 때, 머릿속에 떠올랐던 단어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액체, 기체, 비등점, 기화 따위였었지요. 하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각각의 단어가 갖는 의미도 불분명했지만, 더 자신이 없었던 것은 떠오른 몇몇 단어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내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얼음은 왜 0도에서 얼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액체, 고체, 빙점 등 다시 몇 개의 단어가 머릿속을 빙빙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단어들도 문장을 이루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은 항복을 선언하듯 모르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내가 들려준 대답은 싱거울 만큼 간명했습니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 것이 아니라, 물이 끓는 온도를 100도라 하기로 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얼음이 어는 이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0도에서 얼음이 어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 어는 온도를 0도로 하기로 기준을 삼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모든 생물의 생존에 필수적인 물에 대해 그런 기준이 생겼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물이 100도가 되면 끓고 0도가 되면 어는 데는 과학적으로 설명해야 할 뭔가 심오한 이치나 원리가 담겨 있다고 여겼던 내게는 가히 놀랄 만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두 사람은 모두가 놀랐습니다. 나는 그런 기준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들어 놀랐고, 아내는 어찌 그 당연한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었느냐며 놀랐습니다. 분명히 학교 다닐 때 배웠을 거라고 했지만, 물리와 친하지 못한 탓이었는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 것이 아니라 끓는 온도를 100도로 정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멍했는데, 뭔가 마음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닫혀 있어 열린 적이 없던 문 하나가 어디에선가 열리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열린 문을 통과한 바람처럼 찾아들었습니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 이유를 액체, 기체, 비등점 등의 단어를 동원하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려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울까요? 0도에서 어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터이고요. 하지만 끓는 온도를 100도, 어는 온도를 0도로 정한 것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단순해집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보다도 ‘너’를, ‘우리’를 기준으로 삼고 산다면 우리 삶은 훨씬 더 단순하고 명확해질 것이었습니다.
최대한 물리학적인 소양을 담아 대답을 해야지 할 때, 머릿속에 떠올랐던 단어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액체, 기체, 비등점, 기화 따위였었지요. 하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각각의 단어가 갖는 의미도 불분명했지만, 더 자신이 없었던 것은 떠오른 몇몇 단어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내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얼음은 왜 0도에서 얼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액체, 고체, 빙점 등 다시 몇 개의 단어가 머릿속을 빙빙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단어들도 문장을 이루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은 항복을 선언하듯 모르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내가 들려준 대답은 싱거울 만큼 간명했습니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 것이 아니라, 물이 끓는 온도를 100도라 하기로 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얼음이 어는 이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0도에서 얼음이 어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 어는 온도를 0도로 하기로 기준을 삼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모든 생물의 생존에 필수적인 물에 대해 그런 기준이 생겼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물이 100도가 되면 끓고 0도가 되면 어는 데는 과학적으로 설명해야 할 뭔가 심오한 이치나 원리가 담겨 있다고 여겼던 내게는 가히 놀랄 만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두 사람은 모두가 놀랐습니다. 나는 그런 기준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들어 놀랐고, 아내는 어찌 그 당연한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었느냐며 놀랐습니다. 분명히 학교 다닐 때 배웠을 거라고 했지만, 물리와 친하지 못한 탓이었는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 것이 아니라 끓는 온도를 100도로 정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멍했는데, 뭔가 마음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닫혀 있어 열린 적이 없던 문 하나가 어디에선가 열리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열린 문을 통과한 바람처럼 찾아들었습니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 이유를 액체, 기체, 비등점 등의 단어를 동원하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려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울까요? 0도에서 어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터이고요. 하지만 끓는 온도를 100도, 어는 온도를 0도로 정한 것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단순해집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보다도 ‘너’를, ‘우리’를 기준으로 삼고 산다면 우리 삶은 훨씬 더 단순하고 명확해질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