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 스님] 사랑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운 스님] 사랑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by 정운 스님 2018.12.31
일본 다쿠앙[澤庵] 스님에게 한 관리가 찾아왔다. 스님은 그 관리에게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자, 그 관리는 스님에게 ‘시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스님, 제 관직은 아주 재미가 없습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의미 없는 말들만 늘어놓고, 더러는 제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는 말도 많이 합니다. 거의 똑같은 말을 들어야 하고, 어느 때는 따분하기조차 합니다. 너무 따분해서 하루가 정말 1년처럼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제가 시간들을 어떻게 잘 보내야 할까요?”
다쿠앙 스님은 그 관리의 말을 듣고, 딱 두 마디로 대답을 해주었다.
“오늘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잠깐의 시간이라도 귀한 보석처럼 여기십시오[此日不復 寸陰尺寶].”
필자 입장에서 그 관리에게 덧붙인다면,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소중한 인연임을 염두에 두라’고 말하고 싶다. 상대방과 귀중한 인연임을 염두에 둔다면, 당연히 그 시간조차 매우 소중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상대방과 함께 있는 시간이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을 어떻게 마음에서 전환하느냐에 따라 그 시간을 귀하거나 낭비라고 여겨질 수 있다.
며칠 전에 속가의 모친이 전화가 왔다. 내가 살고 있는 사찰이 문제가 있어 이사할 예정인데, 당신의 마음이 늘 편치 않다고 하면서 얼마의 돈을 송금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의 근황을 말했다.
“스님, 내가 감기가 걸린 지 오래됐는데, 낫지가 않아요.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스님에게 서둘러 송금하려고요. 조금 보낼 테니까 이사하는데 보태 쓰세요.”
3년 전, 이맘때 부친이 감기가 지속되다 폐렴으로 진단받고 몇 달 만에 돌아가셨다. 모친은 부친과 똑같은 전철을 밟아 혹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있는 듯했다. 모친과 통화를 마치고 며칠간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혹 모친이 그렇게 세상을 떠난다면, 모친과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년에 두어 번 보는데, 그것도 모친이 내게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연이 늘 지속될 것 같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무상의 삶이다. 사람의 생명을 어찌 보장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사형집행을 받아놓은 한시적인 인생을 살아간다. 필자도 작년에 병이 나서 고생한 적이 있다. 병원에서 수여 가지 검사를 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등 생로병사의 고통을 뼈저리게 겪었던 바다. 그러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내일 만난다는 보장을 어찌할 것인가?
삶이 길지 않다. 오늘 함께 한 사람들과 마지막 만남이 될지 모른다. 필자야 홀로이지만,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그 ‘가족’이라는 것도 영원한 완전체가 아니라 언젠가는 흩어질 모임이다. 그것이 바로 내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시간이 매일 똑같은 것 같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부모와의 인연은 아마 더할 것이다. 해가 바뀌고, 다시 새해를 맞이했다. 부모ㆍ형제ㆍ친구ㆍ지인들….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스님, 제 관직은 아주 재미가 없습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의미 없는 말들만 늘어놓고, 더러는 제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는 말도 많이 합니다. 거의 똑같은 말을 들어야 하고, 어느 때는 따분하기조차 합니다. 너무 따분해서 하루가 정말 1년처럼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제가 시간들을 어떻게 잘 보내야 할까요?”
다쿠앙 스님은 그 관리의 말을 듣고, 딱 두 마디로 대답을 해주었다.
“오늘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잠깐의 시간이라도 귀한 보석처럼 여기십시오[此日不復 寸陰尺寶].”
필자 입장에서 그 관리에게 덧붙인다면,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소중한 인연임을 염두에 두라’고 말하고 싶다. 상대방과 귀중한 인연임을 염두에 둔다면, 당연히 그 시간조차 매우 소중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상대방과 함께 있는 시간이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을 어떻게 마음에서 전환하느냐에 따라 그 시간을 귀하거나 낭비라고 여겨질 수 있다.
며칠 전에 속가의 모친이 전화가 왔다. 내가 살고 있는 사찰이 문제가 있어 이사할 예정인데, 당신의 마음이 늘 편치 않다고 하면서 얼마의 돈을 송금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의 근황을 말했다.
“스님, 내가 감기가 걸린 지 오래됐는데, 낫지가 않아요.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스님에게 서둘러 송금하려고요. 조금 보낼 테니까 이사하는데 보태 쓰세요.”
3년 전, 이맘때 부친이 감기가 지속되다 폐렴으로 진단받고 몇 달 만에 돌아가셨다. 모친은 부친과 똑같은 전철을 밟아 혹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있는 듯했다. 모친과 통화를 마치고 며칠간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혹 모친이 그렇게 세상을 떠난다면, 모친과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년에 두어 번 보는데, 그것도 모친이 내게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연이 늘 지속될 것 같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무상의 삶이다. 사람의 생명을 어찌 보장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사형집행을 받아놓은 한시적인 인생을 살아간다. 필자도 작년에 병이 나서 고생한 적이 있다. 병원에서 수여 가지 검사를 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등 생로병사의 고통을 뼈저리게 겪었던 바다. 그러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내일 만난다는 보장을 어찌할 것인가?
삶이 길지 않다. 오늘 함께 한 사람들과 마지막 만남이 될지 모른다. 필자야 홀로이지만,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그 ‘가족’이라는 것도 영원한 완전체가 아니라 언젠가는 흩어질 모임이다. 그것이 바로 내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시간이 매일 똑같은 것 같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부모와의 인연은 아마 더할 것이다. 해가 바뀌고, 다시 새해를 맞이했다. 부모ㆍ형제ㆍ친구ㆍ지인들….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