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은 대표님] 모이주머니와 모래주머니
[김재은 대표님] 모이주머니와 모래주머니
by 김재은 대표님 2019.02.12
미타사 비탈길 어딘가에서 닭을 키우고 있나 보다.
가끔씩 아침을 깨우는 닭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옥수동의 아침 기상은 우유나 신문배달소리 아니면 동호대교를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동호철교를 지나는 전철 지나는 소리가 도맡아 왔는데, 도심 한복판에서 닭 울음소리라니 정겹고 따뜻하기 그지없다.
어린 시절, 이번 설 명절에도 다녀온 고향의 아침을 여는 단골 소리는 단연 닭 울음소리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고향에서도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고 대신 산비둘기 소리가 아침을 깨운다고 구순을 앞둔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구구~구구하면서.
어쨌거나 고향에서 사라진 닭 울음소리가 옥수동으로 옮겨온 것 같아 반갑다.
애완동물이 여럿 있지만 닭만큼 우리 곁에서 가족의 일부가 되어 지내온 동물도 흔치 않다. 시도 때도 없이 달걀을 주고 때로는 기꺼이 온몸을 내어주기도 하는 참으로 고마운 ‘헌신의 동물’ 아니던가. 치맥의 주인공이 되어 세상의 소통을 주도해 오고 있지 않은가.
이가 없는 조류인 닭에는 모이주머니가 있다.
어린 시절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닭은 모이만 쪼아 먹는 게 아니라 왜 모래나 유리조각들도 쪼아먹을까 하는 거였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닭에는 모이주머니 외에 모래주머니가 따로 있다. 삼켜진 모이가 뱃속에 들어오면 이를 잘게 부수어 소화를 시킬 수 있도록 하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그 역할을 하는 곳이 모래주머니이다.
눈물을 머금고 모래나 깨진 유리조각들을 쪼아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가 없는 닭(조류)은 모이만 있어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반드시 모래가 있어야 한다는 것, 뭔가 의미하는 바가 심상치 않다.
닭의 일상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끌어온다면 아마도 모이가 희(喜)와 락(樂)이라면 모래는 노(怒)와 애(哀)쯤 해당될 것이다.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희와 락만이 있다는 것은 모이주머니만 있는 닭과 같은 것이다.
모이주머니와 모래주머니, 즉 희와 락에 노와 애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닭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닭 울음소리로 아침을 깨우는 것이 치킨보다 훨씬 귀하고 깊이가 있는 선물이다.
오늘 나에게 화가 나고 슬픈 일이 다가온다면 닭의 모래주머니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어쩌면 가득 찬 모이주머니의 모이가 잘게 부수어질 때가 온 것이리라. 이런 생각에 이르면 화가 나고 슬픈 일은 나에게 어느새 고마운 일로 변신해 있게 될 것이다. 전화위복이 따로 없다.
입춘과 설이 지나고 곧 새봄이 우리 곁에 찾아올 것이다.
따뜻한 새봄에 여건이 된다면 노오란 병아리 몇 마리 키워보면 좋겠다.
가까이하는 난초에서 삶의 고고함을 배우듯이 그 병아리에게서 삶의 진실, 행복의 비결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병아리와 함께 하는 기해년 한 해가 늘 ‘인생 봄날’이 되어 어쩌면 나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갈지도 모른다. 모이주머니와 모래주머니와 함께.
가끔씩 아침을 깨우는 닭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옥수동의 아침 기상은 우유나 신문배달소리 아니면 동호대교를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동호철교를 지나는 전철 지나는 소리가 도맡아 왔는데, 도심 한복판에서 닭 울음소리라니 정겹고 따뜻하기 그지없다.
어린 시절, 이번 설 명절에도 다녀온 고향의 아침을 여는 단골 소리는 단연 닭 울음소리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고향에서도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고 대신 산비둘기 소리가 아침을 깨운다고 구순을 앞둔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구구~구구하면서.
어쨌거나 고향에서 사라진 닭 울음소리가 옥수동으로 옮겨온 것 같아 반갑다.
애완동물이 여럿 있지만 닭만큼 우리 곁에서 가족의 일부가 되어 지내온 동물도 흔치 않다. 시도 때도 없이 달걀을 주고 때로는 기꺼이 온몸을 내어주기도 하는 참으로 고마운 ‘헌신의 동물’ 아니던가. 치맥의 주인공이 되어 세상의 소통을 주도해 오고 있지 않은가.
이가 없는 조류인 닭에는 모이주머니가 있다.
어린 시절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닭은 모이만 쪼아 먹는 게 아니라 왜 모래나 유리조각들도 쪼아먹을까 하는 거였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닭에는 모이주머니 외에 모래주머니가 따로 있다. 삼켜진 모이가 뱃속에 들어오면 이를 잘게 부수어 소화를 시킬 수 있도록 하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그 역할을 하는 곳이 모래주머니이다.
눈물을 머금고 모래나 깨진 유리조각들을 쪼아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가 없는 닭(조류)은 모이만 있어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반드시 모래가 있어야 한다는 것, 뭔가 의미하는 바가 심상치 않다.
닭의 일상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끌어온다면 아마도 모이가 희(喜)와 락(樂)이라면 모래는 노(怒)와 애(哀)쯤 해당될 것이다.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희와 락만이 있다는 것은 모이주머니만 있는 닭과 같은 것이다.
모이주머니와 모래주머니, 즉 희와 락에 노와 애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닭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닭 울음소리로 아침을 깨우는 것이 치킨보다 훨씬 귀하고 깊이가 있는 선물이다.
오늘 나에게 화가 나고 슬픈 일이 다가온다면 닭의 모래주머니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어쩌면 가득 찬 모이주머니의 모이가 잘게 부수어질 때가 온 것이리라. 이런 생각에 이르면 화가 나고 슬픈 일은 나에게 어느새 고마운 일로 변신해 있게 될 것이다. 전화위복이 따로 없다.
입춘과 설이 지나고 곧 새봄이 우리 곁에 찾아올 것이다.
따뜻한 새봄에 여건이 된다면 노오란 병아리 몇 마리 키워보면 좋겠다.
가까이하는 난초에서 삶의 고고함을 배우듯이 그 병아리에게서 삶의 진실, 행복의 비결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병아리와 함께 하는 기해년 한 해가 늘 ‘인생 봄날’이 되어 어쩌면 나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갈지도 모른다. 모이주머니와 모래주머니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