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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오래된 다리

[이규섭 시인님] 오래된 다리

by 이규섭 시인님 2019.03.15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는 긴 나라 이름만큼 고단한 역사를 품은 땅이다. 한반도 4분의 1면적에 인구는 386만 명.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인(48%)과 정교도의 세르비아인(37%), 가톨릭의 크로아티아인(14%)이 혼합된 다민족 국가다. 세 명의 대통령이 4년 동안 8개월씩 돌아가며 통치하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복잡한 정치구도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인 중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 중심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1국가 2체제다.
보스니아 남서쪽에 위치한 모스타르는 내전의 상처가 깊은 곳이다. 보스니아 내전은 1992년 보스니아 회교정부 및 크로아티아와 신 유고연방의 지원을 받은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사이에서 벌어진 민족과 종교가 얽힌 분쟁이다. 무슬림은 크로아티아계와 힘을 모아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공격을 힘겹게 물리쳤다. 주변 강대국과 유엔의 개입으로 내전은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영토 확장을 노린 크로아티아의 사주로 크로아티아계 가톨릭교도들이 무슬림의 뒤통수를 치고 공격해 다시 불붙었다.
다정했던 이웃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총을 겨눴다. 내전의 상처는 참혹했다. 폐허가 된 건물이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채 흉물처럼 서 있고, 건물 곳곳엔 총탄의 상흔이 벌집처럼 남았다. 기념품 가게엔 내전 당시 포탄과 탄피로 만든 장난감 탱크 등을 만들어 팔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모스타르의 명물 다리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는 1993년 11월 9일 크로아티아계의 포격으로 무참하게 무너졌다. 무슬림을 고립시키려 유적을 파괴했다. 1566년 오스만 제국이 세운 길이 30m, 폭 5m, 높이 24m의 아치형 이슬람식 석조 다리다. 영어로는 올드 브릿지(Old Bridge), 한국인들에겐 ‘오래된 다리’로 알려졌다.
내전이 끝난 1995년 지구촌 사람들이 돌다리 재건 운동에 참여했다. 강물에 흩어진 잔해를 모아 퍼즐 맞추듯 2004년 복원됐다. 국제적인 협력과 다양한 문화적, 민족적, 종교적 공동체의 공존과 화해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이듬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명분이다. 다리 입구에 ‘1993년을 잊지 말자(Don’t forget 1993)는 작은 표지석이 그날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고 있다. 이 다리를 보려고 관광객들이 몰린다.
다리를 제대로 보려고 강변으로 내려갔다. 옥빛 네레트바 강 위에 흰색 아치형 석조 다리가 반달처럼 걸려 아름답다. 다리 양쪽의 길은 둥글둥글한 호박돌을 깔아 닳고 닳아 윤이 나고 미끄럽다. 가이드는 “외출 나온 무슬림 여성들이 외간 남자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게 깔아놓았다”는 우스개가 있다고 소개해 웃었다.
구 시가지엔 오스만 제국 이전의 건축과 지중해와 서유럽 건축양식 등 여러 문화가 혼재한다. 구불구불한 골목의 오래된 상점에선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호객한다. 상가 뒤 주택가로 접어드니 내전에 희생된 무덤이 가득하다. 다리를 중심으로 신시가지의 우뚝 선 가톨릭 성당 종탑과 구시가지 모스크의 미나레가 불안한 시선으로 마주 보고 있어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