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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스님] 공동 사회에서의 인간의 가치

[정운 스님] 공동 사회에서의 인간의 가치

by 정운 스님 2019.03.19

필자는 아침마다 마을버스를 탄다. 어떤 사람은 두 사람 좌석에서 창가 쪽으로 앉으면 나중에 탄 사람이 앉기 편한데, 복도 쪽에 앉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폰만을 만지작 거린다. 그러니 들어가 앉기도 조금 불편하고, 곧 내리므로 아예 서서 간다.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왜 저렇게 이기적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의 천재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하였다. “공동사회에서 사는 인간의 가치는 그의 감정ㆍ사상ㆍ행동이 주위 타인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증진하는 데에 달려 있다.” 곧 인간의 윤리 기준은 “내가 타인에게 악영향을 끼치느냐, 선의 영향을 끼치느냐”라는 그런 가치 판단을 두고, 그 사람의 도덕성을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 조금 인간다운 면모를 갖춘 이야기를 보자. 인도의 성자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 1895~1986)는 제자들과 함께 기차로 인도 여행을 하였다. 마침 기차 안에서 제자들이 ‘명상’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였다. 현대인들은 명상에 대해 ‘힐링’이라는 말을 내세우며 자신의 정신적 치유라는 명목으로 많이 한다. 곧 자신의 행복을 위해 깊이 생각하고, 마음의 힘든 시간을 치유하려는 이들이 많이 있다.
다시 크리슈나무르티로 돌아가자. 기차 안에서 제자들이 서로 열띤 토론을 하면서 각자 자기주장을 내세웠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자, 한 제자가 스승에게 ‘명상에 대해 정의를 내려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했다.
“우리가 타고 가는 이 기차가 조금 전에 철로에서 염소를 치어서 기차가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시끌벅적하고, 사람들이 한참을 웅성 웅성했는데 그대들은 명상 토론에 열중하느라 그런 일이 일어난 것조차 모르는 것 같더군. 그런 것은 명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남의 아픔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명상에 대해 정의하는 것조차 옳지 않다.”
곧 타인이 아파하고 축생물이 고통 받는데, 자신만을 위한 명상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결국 명상[수행]이란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타인들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어야 진정한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3월 초, 모든 학교가 개강을 하였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 첫 시간이나 두 번째 시간에 이런 내용을 언급한다.
“이 세상은 자신 마음대로 살아가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됩니다. 즉 수업 시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나의 행동이 타인들에게 피해를 주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로 윤리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남에게 피해주는 행동은 삼가십시오.”
‘나 하나쯤이야 괜찮겠지’하면서 다른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 중인데, 본인만 몰래 수업 시간 내내 폰을 하는 학생들도 있다. 주위 친구들이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폰을 한다. 또 개중에는 강의실에 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미안한 기색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크게 낸다. 솔직히 강의하는 입장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안타깝지만, 본인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자신을 희생하면 모든 이들이 행복한데,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에 빠져 있다. 조금만 양보하자!! 남의 아픔을 살피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자신의 기준이 아닌 남의 기준에서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