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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청명, 내 인생의 봄

[이규섭 시인님] 청명, 내 인생의 봄

by 이규섭 시인님 2019.04.05

3월의 끝자락, 눈이 내린다. 밤이 깊어지면서 진눈깨비는 함박눈이 되어 피기 시작한 매화와 앵두꽃에 소복이 쌓인다. 변덕 심한 날씨지만 심술이 심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철없이 내린 눈이 계절을 겨울로 되돌려 놓았다. 텃밭에 내린 눈은 밭고랑을 가렸고, 앞산은 흰옷으로 갈아입었다.
몇 해 전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본 연극 ‘3월의 눈’이 떠오른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은 황혼의 노부부가 빠르게 변하는 세태를 아쉬워하며 정든 집을 떠나는 이야기다. 재개발 열풍 속에 손자를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인 낡은 한옥을 팔고 떠날 준비를 하면서도 잔잔하게 일상을 이어간다.
노부부는 느릿느릿 창호지로 문을 바른다. 할머니는 툇마루에 앉아 남편의 스웨터를 뜨개질한다. 이발하러 간 할아버지는 단골 이발소가 문을 닫았다고 투덜거리며 들어온다. 이 집을 산 새 주인은 재개발로 헐리기 전 돈이 될 만한 문짝과 마루 등을 하나씩 해체해 가져간다. 사라지는 것들의 상징이다. 눈 내리는 3월, 뼈대만 남은 집을 뒤로하고 떠나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지켜야 할 가치는 봄눈처럼 쉽게 사라진다. ‘3월의 눈’은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이자 스테디셀러로 원로 배우들의 중후하고 담백한 연기로 무대에 자주 오른다.
때아닌 봄눈 풍경을 만난 건 소백산 자락의 고향마을. 몇 해 전 낙향한 막내 매형의 팔순잔치에 참석해서다. 어쩌다 고향에 들리면 낯익은 풍경은 사라지고 낯선 얼굴이 더 많아 서먹했다. 징검다리가 있던 개울엔 타원형 목재 다리가 놓이고 다리 옆엔 팔각정이 들어서 운치를 더하지만 옛 정취가 사라져 살갑지 않다. 새로 지은 번듯한 집들은 외지인들이 대부분이고 토착 주민들의 집은 폐가나 집터로 남아있어 씁쓸하다.
친인척들은 집에서 아침을 먹은 뒤 마을 어르신들은 점심을 마을회관에서 대접했다. 회와 고기, 떡과 과일 등 푸짐하게 잔칫상이 차려졌고 흥이 오르자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농촌어르신 복지생활실천사업’ 마을로 선정되어 허름한 노인회관은 헐리고 지난해 2층 규모의 마을회관이 들어섰다. 20여 명의 노인 가운데 할머니들이 할아버지 보다 많다. 농촌지역 어르신 공감프로그램인 ‘구구팔팔 마음더하기’를 통해 치매 예방 교육과 함께 민요를 배우며 단조로운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한다.
100세 시대, 노인들끼리도 세대차가 심해지자 80세 이상만 회원 등록이 가능한 초고령자 전용 경로당이 충북의 한 마을에 개설되어 화제다. 60대와 80대 이상 사이엔 세대 차이가 존재해 터놓고 지내기가 거북하다는 게 이유다. 여성들은 언니 동생으로 허물없이 어울리기 쉽지만 남성들은 완고한 편이다. 고향 마을회관은 노노(老老) 갈등이 없다니 다행이다.
봄눈에 정신이 번쩍 든 매화와 앵두는 더 실한 역경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5일은 청징한 청명(淸明), 봄 밭갈이를 하는 철이다. 신산스러운 세월을 모질게 살아온 어르신들은 마음의 텃밭에 소중한 추억의 꽃씨 뿌리며 ‘내 인생의 봄’을 아름답게 추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