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꿈에 부풀던 내 인생의 한 때
[권영상 작가님] 꿈에 부풀던 내 인생의 한 때
by 권영상 작가님 2019.04.25
작지만 다락방이 있는 2층집을 짓고 싶다. 뜰마당은 넓고, 사람이 오가는 자리엔 잔디를 깔고, 징검돌을 놓는다. 일직선이 아닌 구불구불한 징검돌 길이 좋겠다. 줄장미를 심어 장미꽃 울타리를 만들고, 마당 둘레엔 빙 둘러가며 꽃나무를 심는다. 배롱나무, 산수유, 메이플, 조팝나무, 모란. 유실수로는 매실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모과나무와 어린 새들 먹이에 좋은 팥배나무.
방은 작아도 4개여야 하는데 내 방과 아내의 화실, 침실과 딸아이의 방, 거실. 그리고 본채와 떨어진 곳에 나무 부엌이 딸린 황토방.
대지는 건평을 포함하여 200평. 텃밭엔 감자, 고구마, 토란, 토마토와 고추 채소를 심어 가꾼다. 여름엔 주변 산이나 들에 난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들고, 겨울엔 콩나물을 내어 먹고 콩된장이나 효소를 만든다. 농약 대신 은행나무 잎에 식초를 배합하여 발효한 후 밭에 내어 벌레 꾀는 걸 막는다.
집의 위치로는 어디가 좋을까. 아무리 배산임수라 해도 산불과 산사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숲이나 산기슭 또는 저지대를 피하고, 소나 돼지를 키우는 축사나 공해 배출 공장, 농약을 많이 치는 과수원 인근은 피한다. 고압선이나 고립지역은 피하고 아무리 전망이 좋다고 해도 햇볕 없는 북향은 절대 피한다. 요즘은 건축 자재가 좋고 단열 기술이 발달하여 산등성이도 적지라 하지만 바람 많은 텃밭에 나와 밭일하는 것은 불편하다.
친구삼아 개를 키우고, 대여섯 마리의 닭과 두어 마리의 염소, 서너 개의 벌통을 놓는다.
식사 규칙도 만들었다. 소찬 소식이다. 찬은 3가지, 밥은 한 공기로 하되 깨끗이. 오전엔 일을 하고, 오후엔 책을 읽어 게을러지는 것을 막을 일이며 화요일엔 근동에 나가 지역분들과 친교하고, 목요일엔 음식점을 찾아가 부족해질지도 모를 영양을 보충한다. 그리고 그 노트의 맨 마지막 장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무엇보다 가족을 사랑하기’
오전 내내 물건 정리를 하던 아내가 점심 무렵 노트 한 권을 내놓았다. 첫 장을 넘기자 <장덕리 복사꽃 마을 살러가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귀농! 귀농! 귀농 타령을 하던 한때가 내게 있었다. 그때에 내 꿈을 적어둔 노트다.
장덕리는 주문진 읍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마을이다. 오래전 한창 젊은 시절, 우연히 거기 복사꽃 축제에 갔다가 처음으로 귀농을 꿈꾸었다. 개울을 따라 논벌이 있고 논벌 건너 산기슭 고즈넉한 남향엔 오순도순 농가가 그림 같았다. 번다한 도시 삶을 버리고 그쯤에서 텃밭 가꾸고, 벌치며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계획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세운 걸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다. 서울서 장덕리까지는 승용차로 3시간 반 거리. 집을 정리하고 이주하기 전에는 너무 먼 거리지만 그 후, 다시 한 번 찾아가 부동산 중개소에 내놓은 땅이며 집을 보러 다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그런 알맞은 땅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있다면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곳이거나 산속 그늘진 땅이거나 불량한 땅들이었다. 그 일이 월급쟁이로 사는 내게 너무나 현실성 없는 꿈이라는 걸 나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아무리 좋다 해도 나는 절대 안 가! 그쯤 알아두라구.”
그때 아내가 하던 그 말은 아직도 또렷하다.
내 인생에 꿈을 꾸던 그런 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나름대로 그 꿈의 절반은 이루어 살고 있다.
방은 작아도 4개여야 하는데 내 방과 아내의 화실, 침실과 딸아이의 방, 거실. 그리고 본채와 떨어진 곳에 나무 부엌이 딸린 황토방.
대지는 건평을 포함하여 200평. 텃밭엔 감자, 고구마, 토란, 토마토와 고추 채소를 심어 가꾼다. 여름엔 주변 산이나 들에 난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들고, 겨울엔 콩나물을 내어 먹고 콩된장이나 효소를 만든다. 농약 대신 은행나무 잎에 식초를 배합하여 발효한 후 밭에 내어 벌레 꾀는 걸 막는다.
집의 위치로는 어디가 좋을까. 아무리 배산임수라 해도 산불과 산사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숲이나 산기슭 또는 저지대를 피하고, 소나 돼지를 키우는 축사나 공해 배출 공장, 농약을 많이 치는 과수원 인근은 피한다. 고압선이나 고립지역은 피하고 아무리 전망이 좋다고 해도 햇볕 없는 북향은 절대 피한다. 요즘은 건축 자재가 좋고 단열 기술이 발달하여 산등성이도 적지라 하지만 바람 많은 텃밭에 나와 밭일하는 것은 불편하다.
친구삼아 개를 키우고, 대여섯 마리의 닭과 두어 마리의 염소, 서너 개의 벌통을 놓는다.
식사 규칙도 만들었다. 소찬 소식이다. 찬은 3가지, 밥은 한 공기로 하되 깨끗이. 오전엔 일을 하고, 오후엔 책을 읽어 게을러지는 것을 막을 일이며 화요일엔 근동에 나가 지역분들과 친교하고, 목요일엔 음식점을 찾아가 부족해질지도 모를 영양을 보충한다. 그리고 그 노트의 맨 마지막 장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무엇보다 가족을 사랑하기’
오전 내내 물건 정리를 하던 아내가 점심 무렵 노트 한 권을 내놓았다. 첫 장을 넘기자 <장덕리 복사꽃 마을 살러가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귀농! 귀농! 귀농 타령을 하던 한때가 내게 있었다. 그때에 내 꿈을 적어둔 노트다.
장덕리는 주문진 읍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마을이다. 오래전 한창 젊은 시절, 우연히 거기 복사꽃 축제에 갔다가 처음으로 귀농을 꿈꾸었다. 개울을 따라 논벌이 있고 논벌 건너 산기슭 고즈넉한 남향엔 오순도순 농가가 그림 같았다. 번다한 도시 삶을 버리고 그쯤에서 텃밭 가꾸고, 벌치며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계획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세운 걸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다. 서울서 장덕리까지는 승용차로 3시간 반 거리. 집을 정리하고 이주하기 전에는 너무 먼 거리지만 그 후, 다시 한 번 찾아가 부동산 중개소에 내놓은 땅이며 집을 보러 다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그런 알맞은 땅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있다면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곳이거나 산속 그늘진 땅이거나 불량한 땅들이었다. 그 일이 월급쟁이로 사는 내게 너무나 현실성 없는 꿈이라는 걸 나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아무리 좋다 해도 나는 절대 안 가! 그쯤 알아두라구.”
그때 아내가 하던 그 말은 아직도 또렷하다.
내 인생에 꿈을 꾸던 그런 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나름대로 그 꿈의 절반은 이루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