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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지고 잎은 돋고

꽃은 지고 잎은 돋고

by 강판권 교수님 2019.04.29

떨어진 꽃잎이 바람에 날려 나이 든 등나무에 앉았다. 등나무는 어깨를 펴고 다시 힘을 낸다. 이처럼 세상에는 아주 가벼운 것들이 누군가에게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줄 때가 있다. 힘의 크기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자는 큰 힘이 필요하겠지만 다른 어떤 자는 아주 작은 힘만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큰 힘 혹은 큰 것을 원하지만 많고 큰 것만 원하면 나중에 아주 작은 것조차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크거나 많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기준일 수 없다. 크고 많은 것은 생명체 사람마다 다르다. 자신이 필요한 것만큼만 가지려고 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얻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꽃 진자리 옆에 돋은 새싹은 작지만 새로운 그림자를 만든다. 새로운 그림자는 열매를 감싸면서 나무의 성장을 돕는다. 이처럼 아무리 작은 그림자일지라도 생명을 키울 수 있다. 잎은 나무의 성장에서 가장 중요하다. 잎이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바뀌는 동안 열매도 한층 성숙한다. 나무마다 잎이 다른 것은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햇살이 이파리를 간질이면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조차 없을 만큼 아름답다. 바람의 애무를 받아 춤추는 이파리 모습은 황홀해서 넋이 나간다. 특히 바람에 이파리가 나풀거리면 앞뒤의 다른 모습에 감동한다. 나뭇잎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주 잘 드러낸 작품은 중국 고전 중 하나인 『시경·도요』이다. 여기서는 복사나무 잎을 “애 띠고 고운 복사꽃이여, 그 이파리 무성하구나. 이 아가씨 시집가네.”라고 읊었다. 가냘픈 복사나무의 잎은 예쁜 아가씨의 모습처럼 무척 아름답다. 복사나무 잎이 바람이 날리면 예쁜 아가씨가 나풀나풀 춤을 추는 것 같다.
꽃잎이 떨어진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고, 옆에서 잎이 돋아야만 나무가 성장하듯이 전체를 볼 수 있어야 삶이 알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꽃에 열광하는 것은 삶의 전체를 보는 눈이 부족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꽃이 지고 난 뒤 이듬해 꽃이 필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만들지 못한다. 반면에 꽃이 진 다음 잎을 기억하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만들 수 있다. 잎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잎의 역할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나는 잎의 역할을 생각할 때마다 패엽경을 기억한다. 패엽경은 조개 모양을 닮은 패다라수 잎에 석가모니의 말씀을 적은 경전을 뜻한다.
좋은 기억은 추억으로 남는다. 나무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추억으로 남는다. 특히 어린 시절 나무에 대한 기억은 어른으로 성장해서 추억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에 만났던 나무는 평생 한 사람의 나무에 대한 추억으로 남아 살아가는 데 큰 힘을 준다. 그러나 최근 초등학교 운동장에 오랫동안 살던 나무들이 사라지고 있다. 운동장의 나무가 사라지면 해당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의 나무에 대한 추억도 상처를 입는다. 학교의 나무를 마음대로 베는 것은 나무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나무의 역사를 함부로 지우는 행위는 일제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지우려고 했던 것처럼 범죄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런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