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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스님]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정운 스님]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by 정운 스님 2019.04.30

오래전에 읽었던 내용인데,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내용을 각색해 보았다. 작은 절에 두 형제 스님이 살았다. 형은 학식이 뛰어나고 지혜가 수승했으나 동생은 외눈박이에 학식 또한 부족했다. 어느 날, 이 작은 절에 한 객승이 찾아왔다. 객승은 스님들에게 저녁에 시간을 내서 진리를 논論하자고 청했다. 형 스님은 동생 스님에게 ‘자네는 말과 지혜로는 저분을 상대할 수 없으니, 저 스님이 어떤 말을 해도 너는 침묵만 지켜라.’고 일러두었다.
몇 분이 지나 객승이 형 스님을 찾아와 감탄을 하며 말했다.
“당신의 아우는 정말 뛰어납니다. 불법을 논하는 데 있어 저를 이겼습니다. 처음에 저는 부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의미로 한 손가락을 들어 올렸지요. 그랬더니 그는 두 손가락을 들어 올리더군요. 곧 부처와 가르침은 하나라는 뜻이겠지요. 나는 세 손가락을 들면서 부처와 가르침과 승려[불법승], 3보를 제시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주먹을 면전에서 흔들더군요. 그 세 가지 모두가 하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했지요. 저는 더 이상 그의 지혜를 당할 수가 없었지요. 어쨌든 아우 스님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말을 마치고 객승이 떠나자, 동생 스님이 잔뜩 화가 나서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객승의 행방을 물었다.
“글쎄, 저 객승이 저를 보는 순간 한 손가락을 내보이며 저를 외눈박이라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저는 화가 났지만, 손가락 두 개를 내보이며 두 손은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객승은 손가락 세 개를 내보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눈이 합쳐서 세 개뿐이라는 거지요. 어찌나 화가 나던지 한 대 치려고 주먹을 들었더니, 그 객승이 갑자기 뛰쳐나가지 않겠습니까?”
앞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런 어리석은 사람들….’하며 웃을 것이다. 하지만 앞의 일화처럼 우리 모두는 다 저렇게 살아간다. 자기 식대로, 제멋대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간혹 억울하게 상대로부터 오해받을 때가 있다. 분명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 아무리 ‘아니다’라고 외쳐도 상대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보자. 자신도 자신만의 잣대대로 상대를 평가해서 상대를 눈물짓게 하지 않았는가를…. 분명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보편적인 기준으로 보았다고 하지만, 상대는 억울해하고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대체로 사람들은 가해 입장은 기억하지 못하고, 피해당한 입장만 부각되어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대화를 하는 와중에 이성계가 대사에게 ‘돼지처럼 생겼다’고 핀잔을 주자, 대사는 이성계에게 이런 말을 한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결국 자신에게 보이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다. 한편 자신이 체험하면서 느끼는 사유思惟, 불교적으로 의업意業 또한 자신이 살아오면서 선택[善과 惡]한 것에 대한 결과이다. 곧 자신의 인격은 자신이 살아온 ‘모든 업의 결정체’인 셈이다.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에 의해 자신의 인격이 형성되고, 삶이 벌어진다. 모든 것들은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다. 사람 관계에서든, 어떤 일에 있어서든 문제가 생기면, 곧 자신에 의해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혹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 상대를 원망하지 말자.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