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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나이 들면 정적여행이 좋다

[이규섭 시인님] 나이 들면 정적여행이 좋다

by 이규섭 시인님 2019.06.28

정적(靜的)인 여행이 동적(動的)여행보다 정서적으로 내게 맞다. 같은 둘레길이라도 사색하며 쉬엄쉬엄 걸으면 정적여행이 되고, 숨 가쁘게 잰 걸음으로 구슬땀을 흘리면 동적여행이다. 젊은이들은 엑티비티한 동적여행을 선호하지만 나이 들면 온천욕과 마사지가 좋고, 움직임이 적은 쿠르즈여행이 제격이다. 2년 전 라오스 방비엥에서 짚라인을 타면서 오금이 저리고 울렁증을 느꼈다. 번지 점프는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밤하늘의 별을 헤거나 오로라의 신비를 찾아 떠나면 감성여행이고, 템플스테이와 성지순례는 영적여행이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가 동적여행지라면 물안개 곰실곰실 피어오르는 호수는 정적여행지다. 올 봄 슬로베니아의 블레드호수와 섬과 성을 둘러보며 정적여행의 정점을 찍은 느낌이다. 만년설을 머리에 인 장엄한 율리안 알프스를 배경으로 빙하가 흘러들어 형성된 호수는 넓고 푸르다. 그림 같은 섬을 품은 호수는 대자연의 수채화다. 앙증맞은 섬은 소원의 종이 걸린 성모승천 성당을 품었다. 블레드 섬을 오가는 전통 나룻배 플레트나는 낭만과 행복을 실어 나른다. 130m 높이의 절벽 위 중세시대에 지어진 블레드 성에 오르면 산과 호수와 섬은 동화 같은 몽환적 풍경이 된다. 왜 이곳을 ‘알프스의 푸른 눈동자’라고 하는지 정적여행지의 퍼즐이 맞춰진다.
베네치아 운하의 곤돌라가 검은 예복 같다면, 플레트나는 평상복처럼 소박하다. 18세기부터 이어온 뱃사공은 대를 이어 남자만이 노를 저을 수 있다. 선착장에 내리면 99개의 계단이 가파르다. 성당은 결혼식 장소로도 유명하며 신랑이 신부를 안고 계단을 오르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전설의 스토리텔링을 실행하려면 신랑의 체력이 튼튼해야 하겠다.
행복과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성모승천성당 소원의 종은 관광객이 늘어나자 돈을 받는다. 설산이 그림자를 드리운 호수 주변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호수가 창에 비치는 카페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의 여유가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강 건너 맞은 켠 호숫가 하얀 건물은 유고 연방 티토 대통령의 여름 별장이다. 제3세계 비동맹국가연합의 지도자였던 그의 초청으로 이곳을 방문했던 김일성은 블레드의 아름다움에 반해 정상회담이 끝난 뒤 2주 동안 더 머물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영국의 찰스 황태자, 요르단 후세인 국왕, 인디라 간디, 스타 비비안 리도 방문한 세계적 휴양지다. 티토 별장은 현재 ‘호텔 빌라 블레드’로 옛 명성을 잇는다.
블레드 성은 101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가 독일 국왕 시절 브릭센의 주교 아델베론에게 이 땅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고성(古城)이다. 성 안에는 16세기에 지은 예배당, 블레드 지역 역사를 전시한 박물관, 인쇄소, 주전소, 갤러리, 레스토랑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1000년 화장실은 숨은 그림 찾듯이 해야 볼 수 있다. 반 지하 대장간에 들어서니 젊은 대장장이가 “안녕하세요” 우리말로 인사를 건넨다. 우물이 있는 마당에선 전통놀이와 민속극이 열린다. 성 전체가 파노라마 전망대로 블레드 풍경 속으로 풍덩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