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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추석 폐지 청원까지 해야 하나

[이규섭 시인님] 추석 폐지 청원까지 해야 하나

by 이규섭 시인님 2019.09.06

추석 전 통과의례가 벌초다. 묘에 자란 잡초를 베고 묘 주위를 깔끔하게 정리해 놓아야 성묘할 때 조상 볼 면목이 선다. 추석 전에 벌초를 하지 않으면 ‘조상이 차례상을 받으러 올 때 덤불을 쓰고 온다’는 속담도 있듯이 벌초는 조상에겐 추석빔이다. 매장 보다 화장문화가 보편화되면서 벌초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벌초만 줄어드는 게 아니다. 추석 명절의 의미도 갈수록 퇴색되고 있다. 올해는 추석이 빨라 ‘여름 추석’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사과 배 등 제수용품 수급에 차질이 생겼다. 벼들도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다. 햇곡식으로 조상들께 감사의 마음으로 차례를 지내는 풍속이 아열대기후로 변화면서 추석과 추수의 균형추를 맞추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 같다.
경기침체 장기화로 주머니에 찬바람이 인다. 직장인들은 연봉제로 바뀌면서 명절 보너스를 별도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님께 용돈도 드려야 하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려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즐거워야 할 명절이 부담이 된다. 귀향의 설렘보다 귀성의 고달픔도 녹록지 않다. 장시간 교통체증에 시달리며 핸들을 잡는 건 고역이다.
핵가족시대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면서 명절증후군을 호소하는 가정이 늘어난다. 음식 준비, 차례, 성묘로 이어지는 획일적인 명절 문화에 여성들은 가사부담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명절 성차별 사례를 조사한 결과 여성응답자의 57.1%가 ‘성차별적인 가사노동’부담을 첫 손에 꼽았다. 성인 남녀 10명 중 9명이 ‘명절 연휴가 여성들에게 부담’이라는 시장조사 전문 업체의 조사결과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먹고 치우기를 반복하는 게 전통문화냐는 지적이 나올만하다. 명절만 되면 이혼율이 증가하는 이유다. 법원행정처 통계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추석과 설날 연휴 전후로 하루 평균 577건의 이혼신청서가 접수됐다. 평상시 하루 평균 298건과 비교하면 두 배 많은 수준이다.
젊은 층의 ‘명절 스트레스’도 임계점을 넘었다. 취업, 결혼, 출산이라는 주제가 귀성을 꺼리게 하는 요인이다. 취준생들은 명절에 집에 가면 가시방석이라고 한다. 취직하여 떳떳한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다. 혼기 넘긴 미혼 자녀에게 결혼 채근도 귀성의 기피 이유다. 맞벌이로 아이를 낳아도 키워 줄 사람이 없는데 손주는 언제 보게 해줄 거냐는 부모의 성화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런 불만들이 누적되면서 몇 년 사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명절을 폐지해 달라’는 요구까지 등장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처럼 간략하게 추석을 보내자는 이색 제안도 나왔다. 자기주장의 공론화도 좋지만 민족 고유의 명절까지 없애자는 청원엔 공감하기 어렵다. 차례 절차는 가족이 뜻을 모아 간소화하거나 지내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요즘은 나이 든 부모들의 눈치가 9단이라 며느리와 자식들 듣기 싫은 소리를 자제할 줄 안다. 어렵고 힘들 때 버팀목은 역시 가족이다. 가족의 끈끈한 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게 명절이다. 가족을 배려하고 가사를 분담하면서 명절의 전통은 이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