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 스님] 세상에서 제일 귀한 존재?
[정운 스님] 세상에서 제일 귀한 존재?
by 정운 스님 2019.10.01
옛날 인도 이야기다. 26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석가족과 콜리야족의 물싸움인데, 두 종족은 로히니강을 사이에 두고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았다. 석가족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친족이요, 콜리야족은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종족으로, 두 나라는 인척 관계나 다름없다.
그런데 어느 해 오랜 가뭄으로 로히니강의 물이 점점 말라갔다. 물이 부족하니, 두 종족은 당연히 자신들의 논으로 서로 물을 끌어들이려다 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종족 간의 싸움으로 번져갔다. 서로 험한 말을 하며 비난했고, 농기구까지 들고 나와 서로를 위협했다. 우연히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들의 싸움터로 나아갔다. 부처님은 서로를 죽이려고 화가 나 있는 싸움판 중간으로 들어가 그들의 성난 마음을 진정시킨 뒤 말씀하셨다.
“지금 현재 화가 나서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데, 물이 더 중요한가? 사람이 더 중요한가?”
싸움하던 두 종족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물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이 부족해 말라버린 로히니 강바닥을 피[血]로 채워야 성이 차겠는가? 서로를 살상해 국민들이 모두 죽고 난 뒤에 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고 자신들의 현재 마음을 잘 살펴보아라. 인간의 삶에 어떤 것이 더 소중한가를 ….”
석가족과 콜리야족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때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원한을 원한으로 되갚는다고 해서 맺힌 한이 풀어지는 것은 아니다.
원망을 쉬어야 원한이 풀어진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다.
남에게 고통을 준 대가로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 재앙은 오히려 자신에게 돌아가 원망과 미움만 남는다.”
이런 다툼은 개인과 개인 사이, 친족과 친족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역사 이래 전쟁을 통해 승전 국가가 재물을 얻거나 큰 땅덩어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삶에서 인간의 생명보다 어찌 재물이 소중하겠는가?
이슬람교에서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존경하는 것처럼, 똑같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다. 무함마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자체를 신앙의 경지로 승화시켰고, 더 나아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조건이라고 하였다. 또한 필자가 오래전에 읽은 천주교 책자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다.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아들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주었으니…, 내 형제 중에 보잘것없는[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극진히 대접한 것이 바로 나[예수]에게 한 것과 같다.”
그러면서 고통받는 사람 혹은 죄인을 ‘버림받은 예수’라고 하였다. 곧 고난받는 사람을 예수로 여기는데 어찌 그에게 베풀지 않겠는가?! 한편 한국의 원불교에서도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부처님이니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에 불공하듯이 정성을 다하라[處處佛像 事事佛供].”고 하였다.
이처럼 어느 종교이든 물질[재물과 영토]이 아닌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을 신불神佛과 똑같이 생각하였다. 이는 세상이 아무리 뒤바뀐다 해도 불변의 법칙이다. ‘나’라는 존재가 소중하듯 ‘타인’이라는 존재도 소중히 여기자.
그런데 어느 해 오랜 가뭄으로 로히니강의 물이 점점 말라갔다. 물이 부족하니, 두 종족은 당연히 자신들의 논으로 서로 물을 끌어들이려다 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종족 간의 싸움으로 번져갔다. 서로 험한 말을 하며 비난했고, 농기구까지 들고 나와 서로를 위협했다. 우연히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들의 싸움터로 나아갔다. 부처님은 서로를 죽이려고 화가 나 있는 싸움판 중간으로 들어가 그들의 성난 마음을 진정시킨 뒤 말씀하셨다.
“지금 현재 화가 나서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데, 물이 더 중요한가? 사람이 더 중요한가?”
싸움하던 두 종족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물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이 부족해 말라버린 로히니 강바닥을 피[血]로 채워야 성이 차겠는가? 서로를 살상해 국민들이 모두 죽고 난 뒤에 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고 자신들의 현재 마음을 잘 살펴보아라. 인간의 삶에 어떤 것이 더 소중한가를 ….”
석가족과 콜리야족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때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원한을 원한으로 되갚는다고 해서 맺힌 한이 풀어지는 것은 아니다.
원망을 쉬어야 원한이 풀어진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다.
남에게 고통을 준 대가로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 재앙은 오히려 자신에게 돌아가 원망과 미움만 남는다.”
이런 다툼은 개인과 개인 사이, 친족과 친족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역사 이래 전쟁을 통해 승전 국가가 재물을 얻거나 큰 땅덩어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삶에서 인간의 생명보다 어찌 재물이 소중하겠는가?
이슬람교에서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존경하는 것처럼, 똑같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다. 무함마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자체를 신앙의 경지로 승화시켰고, 더 나아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조건이라고 하였다. 또한 필자가 오래전에 읽은 천주교 책자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다.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아들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주었으니…, 내 형제 중에 보잘것없는[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극진히 대접한 것이 바로 나[예수]에게 한 것과 같다.”
그러면서 고통받는 사람 혹은 죄인을 ‘버림받은 예수’라고 하였다. 곧 고난받는 사람을 예수로 여기는데 어찌 그에게 베풀지 않겠는가?! 한편 한국의 원불교에서도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부처님이니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에 불공하듯이 정성을 다하라[處處佛像 事事佛供].”고 하였다.
이처럼 어느 종교이든 물질[재물과 영토]이 아닌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을 신불神佛과 똑같이 생각하였다. 이는 세상이 아무리 뒤바뀐다 해도 불변의 법칙이다. ‘나’라는 존재가 소중하듯 ‘타인’이라는 존재도 소중히 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