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은 대표님] 용서, 위대한 힘
[김재은 대표님] 용서, 위대한 힘
by 김재은 대표님 2019.10.22
가을날이 참 눈부시다. 하늘빛은 오늘따라 더 찬란하다.
그 어떤 화가가 저 하늘보다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낼 것인가.
순간 그 하늘 위로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운 사람도 있고, 생각만 해도 아문 상처가 덧날 것 같은 사람도 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눈부신 가을날이 마음 깊은 곳의 그것까지 자극했나보다.
생각이라는 것이 참 불가사의하다. 강한 태풍에 모든 것이 다 날아갔다고 여겼는데 어느새 그대로 돌아와, 아니 더 많은 잡동사니까지 데리고 와서 그 자리를 떡하니 채우고 있으니.
수많은 감정덩어리들이 엉겨 붙은 채 말이다.
그 감정중에는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있고,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도 있는 듯하다.
특히 약간의 배신감, 섭섭함, 작은 분노 등이 버무려져 상처로 남아있는 것들이 더 눈에 띈다.
용서라는 말이 있다.
너무 흔해서 설명이 필요없는 듯 하지만 정작 무슨 뜻인지 헤아려 본 적은 없었다.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설명이 너무 기계적이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득 ‘용서(容恕)’의 한자(漢字)가 뒤통수를 때렸다.
특히 ‘서(恕)’는 강력한 울림을 주었다. 마음 심(心) 위에 같은 여(如)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여여한 마음’,‘타인을 바라볼 때 자신과 같이 바라보는 것’으로 풀어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누군가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에 이르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아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마음이 같아져 하나가 되니 용서를 ‘빌’ 곳도, ‘해 줄’ 곳도 없다는 뜻에 이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최고의 지성 중의 한 사람인 달라이 라마는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라 했다.
용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상관없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 그렇듯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그때서야 오래전에 논어에서 본 한 구절이 생각났다.
‘한마디 말로 평생동안 실천할 만한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아마도 ‘서(恕)’일 것이라고 대답한다.
성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을 했던 이유가 있으리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그대로 그 사람의 마음’이 되어 마음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는 ‘용서’야말로 큰 사랑이며 대자비심이 아닐까. 용서할 무엇도 없다는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건 없이 용서하는 사람이 진정 대인이자 참 인간이 아닐까.
이전투구와 온갖 비방과 욕설이 난무하는 시대, 용서의 큰 정신이 참으로 아쉽다.
이 눈부신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 글자,
크고 자유로운 ‘용서(容恕)’의 삶에 대한 행복디자이너의 소회이다.
그 어떤 화가가 저 하늘보다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낼 것인가.
순간 그 하늘 위로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운 사람도 있고, 생각만 해도 아문 상처가 덧날 것 같은 사람도 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눈부신 가을날이 마음 깊은 곳의 그것까지 자극했나보다.
생각이라는 것이 참 불가사의하다. 강한 태풍에 모든 것이 다 날아갔다고 여겼는데 어느새 그대로 돌아와, 아니 더 많은 잡동사니까지 데리고 와서 그 자리를 떡하니 채우고 있으니.
수많은 감정덩어리들이 엉겨 붙은 채 말이다.
그 감정중에는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있고,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도 있는 듯하다.
특히 약간의 배신감, 섭섭함, 작은 분노 등이 버무려져 상처로 남아있는 것들이 더 눈에 띈다.
용서라는 말이 있다.
너무 흔해서 설명이 필요없는 듯 하지만 정작 무슨 뜻인지 헤아려 본 적은 없었다.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설명이 너무 기계적이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득 ‘용서(容恕)’의 한자(漢字)가 뒤통수를 때렸다.
특히 ‘서(恕)’는 강력한 울림을 주었다. 마음 심(心) 위에 같은 여(如)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여여한 마음’,‘타인을 바라볼 때 자신과 같이 바라보는 것’으로 풀어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누군가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에 이르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아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마음이 같아져 하나가 되니 용서를 ‘빌’ 곳도, ‘해 줄’ 곳도 없다는 뜻에 이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최고의 지성 중의 한 사람인 달라이 라마는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라 했다.
용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상관없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 그렇듯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그때서야 오래전에 논어에서 본 한 구절이 생각났다.
‘한마디 말로 평생동안 실천할 만한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아마도 ‘서(恕)’일 것이라고 대답한다.
성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을 했던 이유가 있으리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그대로 그 사람의 마음’이 되어 마음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는 ‘용서’야말로 큰 사랑이며 대자비심이 아닐까. 용서할 무엇도 없다는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건 없이 용서하는 사람이 진정 대인이자 참 인간이 아닐까.
이전투구와 온갖 비방과 욕설이 난무하는 시대, 용서의 큰 정신이 참으로 아쉽다.
이 눈부신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 글자,
크고 자유로운 ‘용서(容恕)’의 삶에 대한 행복디자이너의 소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