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은 대표님] 나이듦에 대하여
[김재은 대표님] 나이듦에 대하여
by 김재은 대표님 2019.11.19
바람을 품은 늦가을 비 한 번에 화려함을 뽐내던 가을 잎들이 속수무책, 말 그대로 추풍낙엽이 되어버렸다. 아직 물들지 않은 잎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잎들이 언제 낙엽이 되는지 궁금했는데 그 비밀이 풀린 듯하여 개운하기도 하지만. 그런데 그 낙엽들에서 내 모습이 살짝 보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벌써 내가 그럴 나이가 되었나 하는 생각을 하다 고향의 부모님이 생각나서 ,‘에이 내가 무슨 벌써?’ 하며 얼버무렸다.
순간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가 스치듯 지나갔다.
몇 구절을 옮긴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가사의 그 마음이 와닿긴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생각을 해보고 싶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뭘까? 나이가 들면 ‘약해지고 희미해지고 비어가는 것’이라 해도 그것을 너무 절대화하는 것은 아닌지.
살아있는 것은 끝내 생로병사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것이 하나의 정해진 각본처럼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감각이 둔해져 어머니의 반찬이 갈수록 짠맛이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머니의 감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터이고.
몇일 전 고향의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송구함과 미안함에 어찌 몰라 한 경험을 했다.
이제 구순 언저리라 거동도 불편하고 해서 텃밭일 돕고, 같이 식사라도 하고 오면 되겠지 했는데, 가을 단풍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근처로 짧은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설악산의 단풍처럼 고운 가을 잎들은 만나지 못했고 비로 주로 차 안에서 만난 가을이었지만 ‘소풍’을 즐기는 모습이 얼마나 가슴을 따뜻하게 하던지 마음이 짠해졌다. 나도 모르게 ‘젊은 사람들의 가을이며 소풍’만을 생각하며 지내온 날들이 나를 아프게 찔렀다.
늙는 것은 젊음을 잃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라고 했다. 인형 안에 인형이 있고 그 안에 또 작은 인형이 자리하고 있는 마트료시카라는 러시아 목각인형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죽음이 삶의 결손이 아니라 축적인 것처럼 노년은 청춘의 결손이 아니라 그 모든 지나간 삶을 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은가.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고,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간다고 했으니 ‘나이듦’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초고령사회로 가고 있는 시대, ‘나이듦’이 꼰대로 등식화되고 귀찮은 존재로 치부되는 시대에 ‘나이듦’을 곰곰이 생각한다. ‘나이듦’이 무시되거나 함부로 생각해도 되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로는 지혜와 경험의 보고(寶庫)이고 감성이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살아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이듦’은 우리 모두의 미래이지 않은가.
깊게 익어가는 가을의 끝에서, 나이듦은 세상과 자연의 거역할 수 없는 이치인지라 난 어떻게 나이들어갈 것인지만 생각하면 되니 마음이 편하다. 젊음을 품고 삶을 품고 살아갈 그 날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순간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가 스치듯 지나갔다.
몇 구절을 옮긴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가사의 그 마음이 와닿긴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생각을 해보고 싶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뭘까? 나이가 들면 ‘약해지고 희미해지고 비어가는 것’이라 해도 그것을 너무 절대화하는 것은 아닌지.
살아있는 것은 끝내 생로병사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것이 하나의 정해진 각본처럼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감각이 둔해져 어머니의 반찬이 갈수록 짠맛이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머니의 감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터이고.
몇일 전 고향의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송구함과 미안함에 어찌 몰라 한 경험을 했다.
이제 구순 언저리라 거동도 불편하고 해서 텃밭일 돕고, 같이 식사라도 하고 오면 되겠지 했는데, 가을 단풍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근처로 짧은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설악산의 단풍처럼 고운 가을 잎들은 만나지 못했고 비로 주로 차 안에서 만난 가을이었지만 ‘소풍’을 즐기는 모습이 얼마나 가슴을 따뜻하게 하던지 마음이 짠해졌다. 나도 모르게 ‘젊은 사람들의 가을이며 소풍’만을 생각하며 지내온 날들이 나를 아프게 찔렀다.
늙는 것은 젊음을 잃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라고 했다. 인형 안에 인형이 있고 그 안에 또 작은 인형이 자리하고 있는 마트료시카라는 러시아 목각인형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죽음이 삶의 결손이 아니라 축적인 것처럼 노년은 청춘의 결손이 아니라 그 모든 지나간 삶을 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은가.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고,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간다고 했으니 ‘나이듦’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초고령사회로 가고 있는 시대, ‘나이듦’이 꼰대로 등식화되고 귀찮은 존재로 치부되는 시대에 ‘나이듦’을 곰곰이 생각한다. ‘나이듦’이 무시되거나 함부로 생각해도 되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로는 지혜와 경험의 보고(寶庫)이고 감성이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살아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이듦’은 우리 모두의 미래이지 않은가.
깊게 익어가는 가을의 끝에서, 나이듦은 세상과 자연의 거역할 수 없는 이치인지라 난 어떻게 나이들어갈 것인지만 생각하면 되니 마음이 편하다. 젊음을 품고 삶을 품고 살아갈 그 날이 설렘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