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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판권 교수님] 낙엽: 잎을 즐기다

[강판권 교수님] 낙엽: 잎을 즐기다

by 강판권 교수님 2019.12.02

낙엽의 계절이다. 나는 나무들이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는 이맘때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낙엽을 ‘잎을 즐긴다’는 의미의 ‘낙엽(樂葉)’이라 적는다. 청소하는 분들은 낙엽이 결코 즐거운 잎일 수 없겠지만 나에게 낙엽은 잎의 특징을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는 나무에 달린 모든 잎의 특징을 자세하게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땅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주어서 관찰하면 같은 나무의 잎이라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 나뭇잎은 형형색색이지만 가장 많은 것은 노란색 혹은 주황색 계통이다. 노란색과 주황색의 단풍잎이 많은 것은 카로티노이드계 때문이다. 초록색의 잎은 세포 내의 색소분자의 상대적인 양에 따라 색깔이 결정된다. 아울러 나뭇잎 속의 색소는 온도·비·낮의 길이 등에 따라 다르다. 노란색의 단풍잎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은행나무의 잎이다. 맑고 높은 가을 하늘에 비친 은행나무의 단풍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을 준다. 은행나무 단풍은 나무에 달려있을 경우에도 아름답지만 모두 땅에 떨어진 모습도 가슴 벅차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은행나무 가로수가 아주 많아서 은행나무 단풍을 밟고 다니지 않을 수 없다. 은행나무 단풍잎을 밟으면 비단을 밟는 것처럼 기분 좋지만 나무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은행나무가 잎을 만들 때나 잎을 떨어뜨릴 때 전혀 도움을 주지도 않았는데도 큰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은행나무의 잎은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중국인들은 오리의 발을 닮았다고 생각해서 ‘압각’이라 불렀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압각수라 부른다. 은행나무의 은행은 ‘은빛살구’라는 뜻이다. 이 말은 열매가 과육을 벗긴 살구나무의 열매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은행나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중국 송나라 때이다. 그 이전에는 주로 압각수라 불렀다. 은행나무의 단풍은 전국 어디서나 만끽할 수 있지만 천연기념물 은행나무의 단풍은 어린 은행나무의 단풍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가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도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의 은행나무와 충북 영동군의 영국사 은행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두 그루 모두 천년의 나이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은행나무이다. 두 그루의 공통점은 모두 사찰에 살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암그루라는 점이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 단풍이 들면 황금 옷을 입은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47미터의 용문사 은행나무 잎에 물이 들면 황금빛에 눈이 부신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우러러보면 자연스럽게 존경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31미터의 영국사 은행나무는 사찰을 지키는 사천왕에 해당한다. 영국사에는 실제 사천왕이 없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주변의 나무들 때문에 멀리서 전체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영국사의 은행나무는 사방이 트여 있어서 멀리서도 전체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영국사 입구에 올라서면 은행나무가 등장한다. 황금 옷을 입은 위풍당당한 모습에 입을 다물 수 없다. 천연기념물 은행나무의 단풍을 보는 것만으로도 해탈을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