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 목사님] 난과 영지가 있는 곳에는
[한희철 목사님] 난과 영지가 있는 곳에는
by 한희철 목사님 2020.02.12
전라북도 김제에는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이제는 이 땅에 얼마 남지 않은 ‘ㄱ’자 예배당으로 알려진 교회입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던 시절, 남자 교우와 여자 교우의 출입문이 달랐고, 예배당 가운데를 천으로 막아 남녀의 시선까지도 섞지 않도록 했던 ‘ㄱ’자 형태의 예배당이 이젠 몇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금산교회가 그중의 하나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금산교회를 찾아오는 것은 단지 ‘ㄱ’자 예배당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한옥으로 지어져 대들보와 서까래와 나무마룻장이 인상적인 ‘ㄱ’자 예배당도 충분히 둘러볼 만한 가치가 있지만, 사람들이 금산교회를 찾는 데에는 금산교회 안에 남아 있는 믿음의 향기 때문입니다. 금산교회는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가 남긴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가 남아 있습니다.
김제지역의 최고 갑부였던 조덕삼은 최의덕 선교사(L.B.Tate)의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조덕삼은 교회를 지을 땅을 헌물하였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조덕삼 집에 머슴으로 들어온 이가 있었으니, 이자익입니다. 경상도 마산 출신으로 먹을 것을 찾아 떠돌다가 조덕삼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조덕삼은 자기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교회에 나갔습니다. 주인과 머슴이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당시 드물고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17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시작한 이자익은 조덕삼의 선처로 결혼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1905년 함께 세례를 받고 곧이어 함께 집사가 되고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07년 교회에 장로 선거가 있었습니다.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최종 후보로 나서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조덕삼은 큰 부자 이자익은 머슴, 나이도 조덕삼이 15살 많았고, 이자익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 비교가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달랐습니다. 이자익이 장로가 된 것이었습니다. 다들 당황하여 얼음 같은 침묵에 휩싸였을 때 조덕삼이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물론 그다음 해에 조덕삼도 이자익에 이어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조덕삼은 선교사와 의논을 하여 모든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면서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자익이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자 이자익 목사를 자신이 섬기고 있는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했습니다. 조덕삼의 품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헤아려보게 됩니다.
그런 믿음의 향기를 맡고 싶어 사람들의 발걸음이 금산을 향하는 것이지요. 옛말에도 그랬으니까요, 난과 영지가 있는 곳에는 절로 길이 난다고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금산교회를 찾아오는 것은 단지 ‘ㄱ’자 예배당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한옥으로 지어져 대들보와 서까래와 나무마룻장이 인상적인 ‘ㄱ’자 예배당도 충분히 둘러볼 만한 가치가 있지만, 사람들이 금산교회를 찾는 데에는 금산교회 안에 남아 있는 믿음의 향기 때문입니다. 금산교회는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가 남긴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가 남아 있습니다.
김제지역의 최고 갑부였던 조덕삼은 최의덕 선교사(L.B.Tate)의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조덕삼은 교회를 지을 땅을 헌물하였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조덕삼 집에 머슴으로 들어온 이가 있었으니, 이자익입니다. 경상도 마산 출신으로 먹을 것을 찾아 떠돌다가 조덕삼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조덕삼은 자기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교회에 나갔습니다. 주인과 머슴이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당시 드물고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17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시작한 이자익은 조덕삼의 선처로 결혼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1905년 함께 세례를 받고 곧이어 함께 집사가 되고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07년 교회에 장로 선거가 있었습니다.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최종 후보로 나서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조덕삼은 큰 부자 이자익은 머슴, 나이도 조덕삼이 15살 많았고, 이자익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 비교가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달랐습니다. 이자익이 장로가 된 것이었습니다. 다들 당황하여 얼음 같은 침묵에 휩싸였을 때 조덕삼이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물론 그다음 해에 조덕삼도 이자익에 이어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조덕삼은 선교사와 의논을 하여 모든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면서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자익이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자 이자익 목사를 자신이 섬기고 있는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했습니다. 조덕삼의 품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헤아려보게 됩니다.
그런 믿음의 향기를 맡고 싶어 사람들의 발걸음이 금산을 향하는 것이지요. 옛말에도 그랬으니까요, 난과 영지가 있는 곳에는 절로 길이 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