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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상 작가님] 소낙비 온 뒤의 고적함

[권영상 작가님] 소낙비 온 뒤의 고적함

by 권영상 작가님 2020.06.17

6월이다. 심심찮게 소낙비 내린다. 유월 소낙비는 가볍지 않다. 잠깐 내려도 거칠다. 여름비라 타고난 성깔이 있다. 그런 까닭에 소낙비 올 무렵의 세상은 쥐 죽은 듯 잠잠하다.
식전부터 산이 떠나가라 울던 새들도 비를 느끼면 배를 채우느라 노래할 틈이 없다. 스쳐가는 바람의 기척에도 놀라 짖어대던 동네 개들조차 차분해진다. 새벽일을 마치고 돌아와 하루 종일 요 앞 삼거리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마을 사람들도 소낙비 징후를 알아채면 다들 숨어들어 거리가 고즈넉해진다.
설렁설렁 바람 분다. 무대 위에 비를 등장시키려는 오래된 자연의 공식이다. 그다음엔 먹장구름이 두려운 속도로 밀려온다. 컴컴해진다. 전운이 감돈다. 격렬하게 번개가 친다. 꿍꿍, 천둥이 운다. 이윽고 들판을 건너오는 빗줄기가 세찬 기세로 마을로 덤벼든다.
농촌에 비 내리면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소란하다. 밭마다 뒤덮인 비닐 피복 때문이다. 고추밭이든 감자밭이든, 심지어 당근에 토란 밭까지 풀김 매는 일이 힘들다 보니 대개의 농사일엔 피복이 동원된다. 비닐 피복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때론 소란하기도 하지만 때론 둔해진 감각을 깨워내는데 한몫한다.
소낙비는 세상을 떠다 메고 갈 듯이 내리 퍼붓는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애꿎은 나무들이 비와 바람의 방향으로 쓰러질 듯 몸부림친다. 유월 소낙비는 이런 방식으로 나무들을 길들인다. 비와 바람이, 때론 이 둘의 합작으로 이 땅의 것들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이 갑작스런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무들은 굴욕적인 모습으로 온몸을 비에 내맡긴다. 밭고랑은 또 밭고랑대로 밀려드는 빗물을 낮은 데로 밀어내기에 바쁘다.
그러나 장맛비가 아닌 이상 소낙비는 20여 분 마을을 뒤흔들다가 훌쩍 가버린다. 이를테면 교향곡 제 1악장의 금속 악기와 타악기의 격렬한 연주의 절정처럼 고비를 넘긴 비는 끝이 난다. 그리고 혼돈 같은 고요의 저편에서 클라리넷이 2악장의 주제음악을 이끌고 홀연히 나타나듯 비 끝의 빗물 소리가 또랑또랑 들려온다. 뜰 안 배수구에서 울려 나오는 잔물 빠지는 소리다.
거센 빗물들이 다 달아난 뒤 게으름을 피던 물방울들이 하나하나 모여 이제야 배수구를 빠져나가느라 쪼랑쪼랑 고적한 분위기를 깨뜨린다. 어찌나 맑은지 귀가 파랗게 열린다. 맑은 것은 언제나 거친 혼란과 억압 속에서 흘러나온다. 이쯤이면 모살이가 한창인 무논의 물꼬에 물 빠지는 소리가 똘똘똘 한창이겠다.
방에 들어와 책을 편다. 도닥도닥도닥 도닥거리는 소리가 빈 집을 울린다. 지붕에서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남은 빗물이 내는 소리다. 처음엔 똑,똑,똑 떨어지더니 도닥도닥 느린 박자로 홈통을 울리며 떨어진다. 집안이 고요하다 못해 고적해진다. 잘 보면 소낙비는 확실히 시작보다 그 끝이 아름답다.
잔뜩 비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뜰 안 보리수나무가 몸을 추스르느라 휘청, 한다. 후두두 빗물이 뛰어내린다. 놀란 이웃 가지들이, 이웃 나무들이 연이어 비에 짓눌린 몸을 흔들며 벌떡벌떡 일어선다. 기다렸다는 듯 건너편 숲 위로 뭉게구름이 뭉긋뭉긋 피어오른다. 숨 죽은 듯 조용하던 건너편 숲의 새들이 소리쳐 운다.
구름을 열고 뛰쳐나온 해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운 햇살을 쏟아붓고, 나뭇잎은 반짝이고, 세상은 다시 짙푸른 유월 속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접시꽃은 누가 또 그리운지 함뿍 꽃을 피우고 있다. 창밖 참나리는 그 사이 한 뼘 정도 키가 더 컸다. 담장을 타고 오르는 장미는 더욱 붉고, 대추나무가 이 소란 끝에 하얀 이를 내며 꽃을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