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 스님] 가난하고 청빈한 자들이여!
[정운 스님] 가난하고 청빈한 자들이여!
by 정운 스님 2020.06.29
필자가 원고를 쓰면서 범종교적인 이야기를 원칙으로 하는데, 이번은 스님과 신부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귀감이 될 좋은 분들이어서 소개하는 것이니, 이해하였으면 한다.
조선 시대는 유교를 국교로 했던지라 불교가 매우 핍박받았다. 이런 시대에도 훌륭한 스님이 있었다. 고한(孤閑, 1561∼1647) 스님인데, 함경도 길주 명천明川 출신이다. 12세에 칠보산 운주사에 출가해 교학을 공부하다가 풀로 신을 삼아 파는 등 경제활동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스님들도 시주물이 없고 가난해 경제 활동을 하였다.
어느 해 고한 스님은 세포 16필을 짜 원산 등지로 팔러 다니다가 길가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에 세 포를 모두 도난당했다. 스님은 너무 황망해서 ‘승려로서 배고프고 힘들지라도 수행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길로 개골산에 들어가 정진하였다. 이 무렵, 고한 스님은 조선 시대 유명한 선사인 부휴 선수 스님을 찾아갔다. 고한 스님은 3년 동안 스승 곁에 머물러 경전을 공부하며 열심히 수행하였다.
그러다 고한 스님은 ‘이제는 법을 펴야겠다’고 생각하고 절을 나섰다. 스님이 남쪽 지역으로 내려가던 중, 낙동강 가를 지날 때 수여 명의 아이들이 스님을 모래밭에 파묻어 놓고 목만 내놓았다. 지나는 사람이 스님을 구해 주었더니, 스님은 툴툴 털고 일어나 화도 내지 않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누군가 스님에게 음식을 드리면, ‘공양 받을 만한 덕이 부족하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혹 스님의 방문 앞에 누룽지를 몰래 갖다 놓으면, 고한스님은 반드시 그릇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간혹 누군가 법문을 청하면, 성심껏 가르쳐 주었다.
고한 스님은 채소라도 고급 음식은 먹지 않았고, 말 그대로 허름한 채소 반찬 만 먹었다. 사람들이 입고 버린 것을 주워 입었으며, 옷도 단 한 벌뿐이었다. 광해군이 국가 의례로 재齋를 베풀 때, 고한 스님을 청하고 비단으로 수놓은 가사를 하사했다. 스님은 가사를 착용하고 재를 지낸 뒤 이튿날 새벽에 가사를 그대로 벗어놓고 사라졌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었다. 이때 교황이 비행기 트랙에서 내려 작은 소형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단순한 한 장면이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또 이런 비슷한 신부님을 만났다.
작년에 필자는 일본에서 열린 한중일 종교 평화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불교 발표자로 참여했는데, 이때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KCRP] 대표였던 김희중 대주교님이 동행했다. 이때 김희중 주교님의 소탈한 모습과 젊은 승려인 내게 베풀었던 모습이 감동이었다. 잠깐 함께 있었지만, 젊은 사람들이나 직원에게 권위적이지 않으며 평등하게 베푸는 것을 보았다. 당시 머물던 숙소에 생수가 비치되지 않았는데, 주교님은 직원에게 ‘생수가 숙소에 없는데 숙소에서 사 먹으면 비싸다며 슈퍼에서 사 오라’고 하셨다. 이런 데서도 주교님의 평소 검소함이 보였다. 행사가 3박 4일이었는데, 주교님은 옷도 단 한 벌이었다.
현시대 물질은 풍부하고, 어느 나라나 인종 차별과 혐오가 범람하는 이즈음이다. 청빈한 신부님과 가난한 스님, 그리고 이들이 누구에게나 평등이 베푸는 사랑, 한 번쯤 삶의 귀감으로 삼으면 어떨까?
조선 시대는 유교를 국교로 했던지라 불교가 매우 핍박받았다. 이런 시대에도 훌륭한 스님이 있었다. 고한(孤閑, 1561∼1647) 스님인데, 함경도 길주 명천明川 출신이다. 12세에 칠보산 운주사에 출가해 교학을 공부하다가 풀로 신을 삼아 파는 등 경제활동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스님들도 시주물이 없고 가난해 경제 활동을 하였다.
어느 해 고한 스님은 세포 16필을 짜 원산 등지로 팔러 다니다가 길가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에 세 포를 모두 도난당했다. 스님은 너무 황망해서 ‘승려로서 배고프고 힘들지라도 수행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길로 개골산에 들어가 정진하였다. 이 무렵, 고한 스님은 조선 시대 유명한 선사인 부휴 선수 스님을 찾아갔다. 고한 스님은 3년 동안 스승 곁에 머물러 경전을 공부하며 열심히 수행하였다.
그러다 고한 스님은 ‘이제는 법을 펴야겠다’고 생각하고 절을 나섰다. 스님이 남쪽 지역으로 내려가던 중, 낙동강 가를 지날 때 수여 명의 아이들이 스님을 모래밭에 파묻어 놓고 목만 내놓았다. 지나는 사람이 스님을 구해 주었더니, 스님은 툴툴 털고 일어나 화도 내지 않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누군가 스님에게 음식을 드리면, ‘공양 받을 만한 덕이 부족하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혹 스님의 방문 앞에 누룽지를 몰래 갖다 놓으면, 고한스님은 반드시 그릇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간혹 누군가 법문을 청하면, 성심껏 가르쳐 주었다.
고한 스님은 채소라도 고급 음식은 먹지 않았고, 말 그대로 허름한 채소 반찬 만 먹었다. 사람들이 입고 버린 것을 주워 입었으며, 옷도 단 한 벌뿐이었다. 광해군이 국가 의례로 재齋를 베풀 때, 고한 스님을 청하고 비단으로 수놓은 가사를 하사했다. 스님은 가사를 착용하고 재를 지낸 뒤 이튿날 새벽에 가사를 그대로 벗어놓고 사라졌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었다. 이때 교황이 비행기 트랙에서 내려 작은 소형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단순한 한 장면이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또 이런 비슷한 신부님을 만났다.
작년에 필자는 일본에서 열린 한중일 종교 평화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불교 발표자로 참여했는데, 이때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KCRP] 대표였던 김희중 대주교님이 동행했다. 이때 김희중 주교님의 소탈한 모습과 젊은 승려인 내게 베풀었던 모습이 감동이었다. 잠깐 함께 있었지만, 젊은 사람들이나 직원에게 권위적이지 않으며 평등하게 베푸는 것을 보았다. 당시 머물던 숙소에 생수가 비치되지 않았는데, 주교님은 직원에게 ‘생수가 숙소에 없는데 숙소에서 사 먹으면 비싸다며 슈퍼에서 사 오라’고 하셨다. 이런 데서도 주교님의 평소 검소함이 보였다. 행사가 3박 4일이었는데, 주교님은 옷도 단 한 벌이었다.
현시대 물질은 풍부하고, 어느 나라나 인종 차별과 혐오가 범람하는 이즈음이다. 청빈한 신부님과 가난한 스님, 그리고 이들이 누구에게나 평등이 베푸는 사랑, 한 번쯤 삶의 귀감으로 삼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