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섭 시인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자
[이규섭 시인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자
by 이규섭 시인님 2020.08.07
세상은 좁다(small world). 한국은 더 좁은 사회다. 몇 다리 건너면 다 안다. 몇 다리 건너야 아는 사회가 될까? 그 궁금증을 2004년 중앙일보와 연세대가 공동 조사한 ‘사회연결망’이 풀어줬다. 답은 3.6명이다. 전혀 모르는 사이끼리라도 세 사람 또는 네 사람만 거치면 다 알게 된다는 소리다.
최근 그 결과를 체험했다. 김경래 언론계 대선배의 둘째 딸 김원숙(재미 화가) 작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또 다른 김용원 언론계 선배를 통해 알았다. 김용원 선배의 맏딸 김진영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는 서울 평창동 ‘애호가의 집’ 갤러리에 김원숙 작가의 작품 전시 공간을 별도로 마련했다. 설치작품을 공개한 지난해 가을, 김원숙 작가 부부와 김 작가의 아버지 김경래 선배가 초대됐다. 김경래-김용원 두 선배는 한 다리 건너 따님들과 사회연결망이 이어졌다. 필자는 두 선배를 ‘대한언론’지에 시차는 다르지만 인터뷰를 하면서 두 다리 건너 화가와 교수를 알게 된 셈이다.
김경래 대선배는 1960년 경향신문에 입사하여 1962년 ‘월남 파병’ 특종기사를 쓰는 등 언론 외길을 걸으며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기독교계와 사회 지도자로 많은 활동을 펼쳤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며 북한 동포는 물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나라도 지원했다. 80년대는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의 발기인 대표로 활동했다. 2000년대에는 반핵·반김 국민대회에 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누룩처럼 사회운동을 선도했다.
10년 전 마포 양화진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 데, 주차장에서 오라고 손짓한다. “빈손으로 보내기 아쉽다”며 트렁크에서 그림 한 점을 꺼내 주신다. 김원숙 작가의 귀한 그림이다. 담백한 화풍에 소박한 기도가 메마른 영혼을 촉촉이 적신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대우전자 사장 등을 지낸 김용원 선배는 퇴임 후 한강포럼을 26년째 이끌며 우리 사회의 여론을 선도하며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컬렉터이자 애호가로 60년대 화랑가와 작가들, 애호가로서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저서를 곧 출간할 예정이어서 최근에 인터뷰했다. 그림에 대한 안목이 깊고 넓어 40여 년 전부터 김원숙 작가의 전시회를 찾았고, 2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을 나온 김원숙 작가는 미국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고, 국내외를 넘나들며 개인전을 열었다. 1995년 유엔이 정한 ‘올해의 예술가’에 이름을 올렸다. 화가와 기업가로 만난 김원숙-클레멘트 부부는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교에 1200만 달러(약 143억 원)를 기부했다. 대학 측은 지난해 9월 예술대학 이름을 김원숙 칼리지(Kim Won Sook College of Fine Art)로 바꿨다. 미국 공립대학 최초로 한인 이름을 딴 단과대 주인공이 됐다.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사회연결망에 얽혀 산다. 사회관계 망에서 중요한 존재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해 주는 다리 같은 사람이다. 기우는 운동장 같은 위태로운 세상,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서로의 손을 잡아주자.
최근 그 결과를 체험했다. 김경래 언론계 대선배의 둘째 딸 김원숙(재미 화가) 작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또 다른 김용원 언론계 선배를 통해 알았다. 김용원 선배의 맏딸 김진영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는 서울 평창동 ‘애호가의 집’ 갤러리에 김원숙 작가의 작품 전시 공간을 별도로 마련했다. 설치작품을 공개한 지난해 가을, 김원숙 작가 부부와 김 작가의 아버지 김경래 선배가 초대됐다. 김경래-김용원 두 선배는 한 다리 건너 따님들과 사회연결망이 이어졌다. 필자는 두 선배를 ‘대한언론’지에 시차는 다르지만 인터뷰를 하면서 두 다리 건너 화가와 교수를 알게 된 셈이다.
김경래 대선배는 1960년 경향신문에 입사하여 1962년 ‘월남 파병’ 특종기사를 쓰는 등 언론 외길을 걸으며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기독교계와 사회 지도자로 많은 활동을 펼쳤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며 북한 동포는 물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나라도 지원했다. 80년대는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의 발기인 대표로 활동했다. 2000년대에는 반핵·반김 국민대회에 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누룩처럼 사회운동을 선도했다.
10년 전 마포 양화진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 데, 주차장에서 오라고 손짓한다. “빈손으로 보내기 아쉽다”며 트렁크에서 그림 한 점을 꺼내 주신다. 김원숙 작가의 귀한 그림이다. 담백한 화풍에 소박한 기도가 메마른 영혼을 촉촉이 적신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대우전자 사장 등을 지낸 김용원 선배는 퇴임 후 한강포럼을 26년째 이끌며 우리 사회의 여론을 선도하며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컬렉터이자 애호가로 60년대 화랑가와 작가들, 애호가로서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저서를 곧 출간할 예정이어서 최근에 인터뷰했다. 그림에 대한 안목이 깊고 넓어 40여 년 전부터 김원숙 작가의 전시회를 찾았고, 2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을 나온 김원숙 작가는 미국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고, 국내외를 넘나들며 개인전을 열었다. 1995년 유엔이 정한 ‘올해의 예술가’에 이름을 올렸다. 화가와 기업가로 만난 김원숙-클레멘트 부부는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교에 1200만 달러(약 143억 원)를 기부했다. 대학 측은 지난해 9월 예술대학 이름을 김원숙 칼리지(Kim Won Sook College of Fine Art)로 바꿨다. 미국 공립대학 최초로 한인 이름을 딴 단과대 주인공이 됐다.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사회연결망에 얽혀 산다. 사회관계 망에서 중요한 존재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해 주는 다리 같은 사람이다. 기우는 운동장 같은 위태로운 세상,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서로의 손을 잡아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