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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직설

풍자와 직설

by 이규섭 시인님 2020.08.24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된 뒤 춘향이를 구하러 남원으로 갔습니다. 현행법을 적용하면 무슨 죄가 될까요?”
미디어 강의 시작 때 흥미를 유발하고 집중도를 높이려 흔히 쓰는 넌센스 퀴즈다. 처음엔 쭈뼛거리다 한 학생이 말문을 트면 앞다퉈 ‘아무 말 대잔치’를 펼친다. 이몽룡이 직위를 이용해 사사롭게 애인을 구하러 갔으니 ‘직권남용죄’에 해당된다. 공직자로 변 사또 잔치 음식을 먹었으니 ‘김영란법’에 걸린다.
죄가 많기로는 선녀의 옷을 훔친 나무꾼이다. 목욕 장면을 훔쳐본 ‘관음증’ ‘천상의 업무방해죄’ 선녀의 옷을 숨긴 ‘재물 은닉죄’와 ‘감금죄’, 살자고 강요한 ‘공갈협박죄’ 등 적용할 형법이 차고 넘친다.
고전을 이용한 뚱딴지같은 소리는 웃자고 하는 것이지만, ‘대한문국(大韓文國) 법률용어집’은 현 정권에서 사법기관이 본연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통렬하게 풍자한다. 작성자가 알려지지 않은 이 글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다가 기사화돼 화제다. 한자어를 변용시켜 양심의 최후 보루라는 사법부(司法府)를 ‘법이 죽어 썩고 있다’는 ‘사법부(死法腐)’라 조롱한다.
헌법재판소를 줄인 헌재(憲裁)는 ‘나라에 재앙을 갖다 안겨준다’는 헌재(獻災), 법원(法院)은 ‘법과는 거리가 멀다’는 ‘법원(法遠)’이다, 경찰(警察)은 ‘정권 편으로 치우쳐서 옳은 쪽을 억울하게 핍박한다.’는 의미로 ‘경찰(傾拶)’이라 규정한다. 이 용어집에서 판결(判決)은 ‘올바른 판단력이 결여된 판사의 결론’이란 의미의 ‘판결(判缺)’, 법관(法官)은 ‘법이 죽어서 관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의 ‘법관(法棺)’으로 적혀 있다.
헌법(憲法)은 ‘법을 권력 앞에 갔다 바친다’는 ‘헌법(獻法)’이다. 이런 비난을 들을 만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지역 유지와 향판(鄕判) 출신 변호사들이 유착하여 봐주기 재판을 한다는 ‘향판’은 고전이다. ‘신라젠’ 로비 의혹을 취재하다 강요미수혐의로 구속된 전 채널A 기자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때 ‘언론과 검찰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라는 사유는 다분히 정치적 잣대다. ‘헌법(獻法)’의 확실한 원용이다.
파격 인사와 조직 개편으로 칼춤을 추는 법무부 장관은 ‘법이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썩어버린 꼴이 볼만하다’는 ‘법무부 장관(法無腐 壯觀)’이라 비아냥거린다. 검찰 총장의 지휘권을 박탈한 것은 ‘칼을 갖고 옳은 사람을 억누른다’하여 ‘핍박할 찰(拶) 자’를 써서 ‘검찰(劍拶)’로 불린다.
지난 7월 경기지사에게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대법관 찬반 비율은 7대 5였다. 대법원은 선거 TV 토론에서 ‘거짓말은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허위사실 공표가 아니다’라는 판례를 만들어 면죄부를 줬다. 앞으로 선거 TV 토론서 방어용 거짓말은 해도 된다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사법부가 제 기능을 못하면 삼권분립(三權分立)이 아니라 행정부에 의한 ‘삼권독식(三權獨食)’이 된다. 풍자는 빗나간 세태를 꼬집는 해학이다. 풍자와 조롱의 현상이 국민 심기를 읽어내지 못하면 공격적 직설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