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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시무 7조’ 상소문 소회

[이규섭 시인님] ‘시무 7조’ 상소문 소회

by 이규섭 시인님 2020.09.04

진인(塵人) 조은산이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시무 7조를 주청하는 상소문을 읽으며 김지하 시인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이 떠올랐다. 상소문과 담시의 공통점은 시국에 대한 풍자와 해학, 통열한 비판이다. ‘오적’은 1970년 사상계(思想界) 5월 호에 발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다. 판소리 사설 형식을 차용하여 시어의 반복과 대담한 생략, 비어와 속어의 배치 등으로 부정과 비리를 해학적으로 풍자하고 비판하여 정치적 파장으로 이어졌다. 김지하는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되고 사상계는 강제 폐간 당했다. 어둡던 시절의 단면이다.
‘시무 7조’ 상소문도 처음엔 청와대 게시판에 숨겼다가 비판이 일자 공개로 전환했다. 지난 8월 27일 공개 하루 만에 30만 명의 동의를 얻는 신드롬이다. 시무(時務)란 ‘당대에 다뤄야 할 시급한 일’을 뜻한다. 진인은 이 시대의 시급한 일곱 가지 과제로 세금 감면, 감성 보다 이성, 명분 보다 실리외교, 인간의 욕구 인정, 인사가 만사, 헌법 가치, 일신을 꼽았다. 문체는 왕조시대 임금에게 올리는 극진한 경어 투지만 현 실정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원고지 68매 분량의 상소문은 조목조목 예리하게 분석해 논리적이다. 문학적 감수성과 표현력도 빼어나다. ‘경상의 멸치와 전라의 다시마로 육수를 낸 국물은 아이의 눈처럼 맑았고, 할미의 주름처럼 깊었다’는 감성적 묘사는 절창이다. 정치인들의 거친 말과 달리 습자지처럼 마음을 빨아드린다. 기사와 블로그 등에 달린 댓글은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말’이라며 공감을 드러냈다. ‘필력은 신라시대 최치원, 강직함은 성삼문, 해학은 김삿갓 같다’는 댓글이 맥락을 제대로 짚었다.
시의적절한 수사와 사자성어 인용은 글쓴이가 60대 전후 내공이 쌓인 지식인으로 유추했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조씨 는 인천에서 어린 두 자녀를 키우는 평범한 30대 후반의 가장으로 밝혀졌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이 메일 인터뷰에서 “큰 업적을 이룬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며 그저 세상 밑바닥에서 밥벌이에 몰두하는 애 아빠일 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먼지 진(塵) 자 아호(雅號) ‘진인’은 총각시절 공사판을 전전하면서 먼지와 공해를 뒤집어쓰며 살아왔기에 ‘먼지 같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한껏 낮췄다. “나 여기 있소”라며 자기 PR에 몰두하는 세태에 돋보이는 겸양지덕까지 갖췄다. 조은산은 필명이며 실명이 밝혀지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또 하나 주목을 끄는 것은 자신은 한때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자였으며 지금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라고 한다. 양극단의 진영논리에 식상했던 중도층의 공감 폭이 큰 이유다.
율곡 이이는 선조에게 ‘시무 6조’를 통해 ‘십만 양병설’을 주청했으나 선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상소를 올린 1년 뒤 율곡은 죽고, 9년 뒤 임진왜란이 터지는 비운을 겪었다. 청와대 답변 요건인 20만 명은 단숨에 넘겼다. 청와대가 어떤 식의 답변을 내놓을지 기대하지는 않지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