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은 대표님] 나의 묘비명을 알려드릴게요
[김재은 대표님] 나의 묘비명을 알려드릴게요
by 김재은 대표님 2020.09.08
‘용케도 죽음을 피해 가며 오래 살긴 했지만(‘우물쭈물하다가’로 살짝 오역되어 있음) 언젠가는 내게도 일어날 줄을 알고 있었어’
널리 알려진 영국 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버나드 쇼도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었을 것이기에 그의 묘비명은 상식 같은 문구이지만 그래서 더 울림이 있다. 세상에 ‘우물쭈물’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어찌하든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진솔해질 거라는 생각이 드니 ‘묘비명’이야말로 삶의 궁극적 목적을 이야기할 때 잘 어울릴 듯 하다.
인도의 구루로 칭해지기도 했던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의 묘비명은 이러하다.
‘태어나지 않았고 죽지 않았다. 다만 지구라는 행성을 다녀갔을 뿐이다’
미국 생존 작가인 스티븐 킹은 이런 묘비명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그는 본래의 자기보다 나아지려고 애썼다.’
‘자기보다 훌륭하고 덕이 높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곁에 모아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
이것은 미국의 기업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엔드류 카네기의 묘비명이다. 평생의 그의 삶을 생각해보니 역시 그 답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찰스 부코스키의 묘비명은 조금 더 특별하다.
‘애쓰지 마라.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기다려라.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좀 더 기다려라. 그건 벽 높은 데 있는 벌레 같은 거다. 그게 너에게 오기를 기다려라. 그러다가 충분히 가까워지면 팔을 쭉 뻗어 탁 쳐서 죽이는 거다.’
우리는 두려움에서 도망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데, 찰스 부코스키는 애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애썼다 하니 그 삶에 경이감이 절로 느껴진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널리 알려진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언제부터인가 내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자유의 의미가 이토록 다가오는 말이 있었던가.
이런저런 묘비명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묘비명은 누군가의 삶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다운 삶’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나의 묘비명을 남긴다. 언젠가 바뀔 수도 있겠지만.
‘잔머리 굴리는 게 서툴렀지만 순박하고 따뜻했던, 늘 세상과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그가 여기 잠들다.’
널리 알려진 영국 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버나드 쇼도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었을 것이기에 그의 묘비명은 상식 같은 문구이지만 그래서 더 울림이 있다. 세상에 ‘우물쭈물’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어찌하든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진솔해질 거라는 생각이 드니 ‘묘비명’이야말로 삶의 궁극적 목적을 이야기할 때 잘 어울릴 듯 하다.
인도의 구루로 칭해지기도 했던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의 묘비명은 이러하다.
‘태어나지 않았고 죽지 않았다. 다만 지구라는 행성을 다녀갔을 뿐이다’
미국 생존 작가인 스티븐 킹은 이런 묘비명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그는 본래의 자기보다 나아지려고 애썼다.’
‘자기보다 훌륭하고 덕이 높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곁에 모아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
이것은 미국의 기업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엔드류 카네기의 묘비명이다. 평생의 그의 삶을 생각해보니 역시 그 답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찰스 부코스키의 묘비명은 조금 더 특별하다.
‘애쓰지 마라.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기다려라.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좀 더 기다려라. 그건 벽 높은 데 있는 벌레 같은 거다. 그게 너에게 오기를 기다려라. 그러다가 충분히 가까워지면 팔을 쭉 뻗어 탁 쳐서 죽이는 거다.’
우리는 두려움에서 도망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데, 찰스 부코스키는 애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애썼다 하니 그 삶에 경이감이 절로 느껴진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널리 알려진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언제부터인가 내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자유의 의미가 이토록 다가오는 말이 있었던가.
이런저런 묘비명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묘비명은 누군가의 삶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다운 삶’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나의 묘비명을 남긴다. 언젠가 바뀔 수도 있겠지만.
‘잔머리 굴리는 게 서툴렀지만 순박하고 따뜻했던, 늘 세상과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그가 여기 잠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