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판권 교수님] 산 자와 죽은 자의 역할
[강판권 교수님] 산 자와 죽은 자의 역할
by 강판권 교수님 2020.10.05
죽은 자가 산 자를 힘들게 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일상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나는 집 근처 산에서 이런 사례를 자주 목격한다. 인근 산에는 죽은 자를 모신 산소(山所)가 많다. 산소 중에는 주인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주인이 있는 산소는 해마다 관리하기 때문에 금세 눈에 띈다. 내가 다니는 산길 주변에도 주인이 있는 산소가 적지 않다. 그런데 주인이 있는 산소 주변에는 나무들이 없다. 산소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나무를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간혹 울창한 숲속에 텅 비어 있는 곳을 발견한다. 그곳이 바로 누군가의 산소다.
내가 다니는 산길 주변에는 재선충으로 죽은 소나무가 적지 않다. 어느 지점에 가면 죽은 소나무로 살아 있는 소나무를 받쳐 놓은 현장을 만난다. 그러나 바로 옆의 산소 주변에는 한 그루 오동나무가 죽은 채로 서 있다. 산소의 주인이 줄기의 껍질을 벗겨버렸기 때문이다. 산소 주변에서는 이 같은 사례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하는 경우와 죽은 자가 산자를 죽이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산 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깊게 생각했다. 간혹 인류 역사에는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서 전쟁도 마다하지 경우도 있다.
중국의 서주(西周) 시대에는 살아 있는 나무로 산소의 신분을 구분했다. 천자의 산소에는 소나무를, 제후의 산소에는 측백나무를, 사의 산소에는 회화나무를, 평민의 산소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천자에서 사까지는 지배층이고, 평민은 피지배층이다. 천자와 제후의 산소에 심은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늘푸른큰키나무지만, 회화나무와 버드나무는 갈잎큰키나무다. 중국 서주 봉건시대의 나무에 대한 인식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그대로 수용했다. 그래서 지금 조선시대 궁궐과 양반의 산소에는 이 같은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
서주에서 나무로 신분을 구분한 것은 세월이 흐르면 봉분이 무너져서 산소의 신분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산소에는 산소 중앙이나 주변에 나무들이 아주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의 산소 관련 전통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유독 나무만 다르게 수용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소 주변에 나무들이 살면 조상의 시신을 해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추석 명절 때마다 산소를 관리할 때 주변의 나무를 거침없이 베어버린다.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를 흙에 묻은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죽은 자를 ‘돌아가셨다’고 하는 말도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자연 생태는 인간을 낳은 어머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자 옆에 나무가 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나무를 죽기 살기로 베어버린다는 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산소는 결국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산 자 자신을 위하는 삶의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산 자가 살아 있는 나무를 함부로 죽이는 것은 결코 죽은 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지금 인류는 지혜롭게 살지 않으면 위기를 넘길 수 없다. 자연의 이치를 아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다.
내가 다니는 산길 주변에는 재선충으로 죽은 소나무가 적지 않다. 어느 지점에 가면 죽은 소나무로 살아 있는 소나무를 받쳐 놓은 현장을 만난다. 그러나 바로 옆의 산소 주변에는 한 그루 오동나무가 죽은 채로 서 있다. 산소의 주인이 줄기의 껍질을 벗겨버렸기 때문이다. 산소 주변에서는 이 같은 사례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하는 경우와 죽은 자가 산자를 죽이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산 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깊게 생각했다. 간혹 인류 역사에는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서 전쟁도 마다하지 경우도 있다.
중국의 서주(西周) 시대에는 살아 있는 나무로 산소의 신분을 구분했다. 천자의 산소에는 소나무를, 제후의 산소에는 측백나무를, 사의 산소에는 회화나무를, 평민의 산소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천자에서 사까지는 지배층이고, 평민은 피지배층이다. 천자와 제후의 산소에 심은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늘푸른큰키나무지만, 회화나무와 버드나무는 갈잎큰키나무다. 중국 서주 봉건시대의 나무에 대한 인식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그대로 수용했다. 그래서 지금 조선시대 궁궐과 양반의 산소에는 이 같은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
서주에서 나무로 신분을 구분한 것은 세월이 흐르면 봉분이 무너져서 산소의 신분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산소에는 산소 중앙이나 주변에 나무들이 아주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의 산소 관련 전통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유독 나무만 다르게 수용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소 주변에 나무들이 살면 조상의 시신을 해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추석 명절 때마다 산소를 관리할 때 주변의 나무를 거침없이 베어버린다.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를 흙에 묻은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죽은 자를 ‘돌아가셨다’고 하는 말도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자연 생태는 인간을 낳은 어머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자 옆에 나무가 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나무를 죽기 살기로 베어버린다는 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산소는 결국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산 자 자신을 위하는 삶의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산 자가 살아 있는 나무를 함부로 죽이는 것은 결코 죽은 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지금 인류는 지혜롭게 살지 않으면 위기를 넘길 수 없다. 자연의 이치를 아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