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노랗게 익는 하덕리 가을
[권영상 작가님] 노랗게 익는 하덕리 가을
by 권영상 작가님 2020.10.15
안성으로 내려온 첫날부터 아내가 알레르기 증상을 보인다. 눈물에 콧물, 재채기가 심해지더니 결국 드러누웠다. 환절기만 되면 한두 달 알레르기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계절이 완전히 바뀌면 덥든 춥든 알레르기는 사라진다.
차를 몰아 삼죽면 약국으로 향했다. 한길에 나서면서부터 들판이 눈부시다. 길 양편으로 펼쳐진 논벌이 샛노랗다. 오후 쪽으로 기운 가을볕에 벼들이 눈이 어리도록 빛난다. 약을 사러 가는 길이 아니라면 차를 세우고 논두렁 길을 걸어보고 싶다. 어제도 서울서 내려오는 내내 누렇게 익는 벼와 여기저기 벼 베는 모습을 보며 가을도 잠깐이겠구나, 했다.
면으로 가는 길은 좁은 왕복 2차선이다. 차 세울 곳이 마땅치 않아 논벌이나 흘끔거리며 10여 분 거리의 약국에 도착했다. 약을 사들고 나오는데 노랗게 쏟아지는 가을볕이 나를 유혹한다. 드러누운 아내에겐 약간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차를 두고 마을 안길로 걸어 들어갔다. 그 끝에 벼 익는 논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길갓집 오가피나무 울타리엔 오가피 열매가 익고, 시멘트 담장에 올라앉은 호박은 엉덩이가 푸짐할 정도로 크고 누렇다. 텃밭 맨드라미는 붉고, 쪽파는 이랑이랑 푸르다. 슬레이트 집 담 모퉁이를 지나는데 톡톡톡 귀에 익은 소리가 난다.
아, 들깨 바심 중이다. 하얀 챙이 큰 모자를 쓴 할머니 한 분이 들깨 바심을 하고 있다. 밭두덕에 파란 천막 천을 넓게 펴놓고 앉아 마른 들깨 단을 막대기로 톡톡톡 치고 있다. 그 소리가 참 좋다. 마른 들깨 대가 털려난 들깨 껍질이 서로 부딪히며 가볍게 울려나는 소리가 귀에 솔깃하다. 가벼운 것들끼리 서로 부딪히며 속을 비워내는 가을소리 중에 이만한 소리가 있을까. 톡톡톡 들깨 바심 소리가 마음을 자꾸 비게 한다.
콩밭엔 콩잎이 노랗다. 콩잎 노란 콩대에 달린 콩 꼬투리도 벌써 놀밋하다. 따서 까볼 수는 없지만 모르기는 해도 꼬투리 속 햇콩도 가을볕에 노래지고 있겠다. 마을을 지나면 논벌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시골 초등학교가 앞을 가로막는다.
나는 돌아섰다. 약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며 한달음에 달려가 차를 몰았다. 차 안에 가을볕이 가득 들어와 따끈하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 따끈한 햇빛 열기가 좋다. 달려가는 내 눈앞으로 올 때에 보던 그 논벌들이 다시 나타나 내 발길을 잡는다. 아내에겐 안 된 일이지만 길옆 우묵한 곳에 간신히 차를 세웠다. 소원하던 논둑길에 들어섰다. 벼가 익는 논바닥이 말랐다. 벼는 익어도 논바닥에서 벼와 함께 큰 부레옥잠은 파란 꽃을 피우고 있다. 벼 이삭을 손으로 잡아본다. 알이 꼭 차 마찔하다. 쭉정이 하나 없이 알차다. 이 알찬 벼 한 알 한 알이 모여 샛노란 논벌을 만들어 낸 거다.
젊은 시절 아버지를 도와 하루 종일 벼 베던 일이 떠오른다. 때가 되면 작은 누나가 날라온 새참을 먹고, 점심을 먹고, 그 벼를 다 묶어 논두렁에 광이고 집에 돌아가면 고된 가을은 이내 컴컴해진다. 그때 아버지는 배추밭의 서리 맞은 알찬 배추 한 포기를 뽑아 오셨고, 그 저녁엔 흰쌀밥에 배추쌈을 싫도록 먹었다.
차를 세워둔 옆집 울타리엔 조생종 감이며 대추가 붉게 익고 있다. 빗돌에 새겨진 마을 이름이 하덕리다. 그 뒤에 칸나 꽃이 붉다. 마을 여기저기 장성한 은행나무며 느티나무, 굴밤나무가 거인처럼 서 있다. 우리나라 지명에 덕자가 들어있는 곳이 많다. 덕을 베풀려면 땅이 기름져야 한다. 하덕리 논벌이 유난히 황금빛인 이유를 그제야 알겠다.
집에 오니 아내는 내가 늦은 걸 알고 약국 찾기 어려웠어? 한다. 나는 응, 하고 얼버무린다.
차를 몰아 삼죽면 약국으로 향했다. 한길에 나서면서부터 들판이 눈부시다. 길 양편으로 펼쳐진 논벌이 샛노랗다. 오후 쪽으로 기운 가을볕에 벼들이 눈이 어리도록 빛난다. 약을 사러 가는 길이 아니라면 차를 세우고 논두렁 길을 걸어보고 싶다. 어제도 서울서 내려오는 내내 누렇게 익는 벼와 여기저기 벼 베는 모습을 보며 가을도 잠깐이겠구나, 했다.
면으로 가는 길은 좁은 왕복 2차선이다. 차 세울 곳이 마땅치 않아 논벌이나 흘끔거리며 10여 분 거리의 약국에 도착했다. 약을 사들고 나오는데 노랗게 쏟아지는 가을볕이 나를 유혹한다. 드러누운 아내에겐 약간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차를 두고 마을 안길로 걸어 들어갔다. 그 끝에 벼 익는 논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길갓집 오가피나무 울타리엔 오가피 열매가 익고, 시멘트 담장에 올라앉은 호박은 엉덩이가 푸짐할 정도로 크고 누렇다. 텃밭 맨드라미는 붉고, 쪽파는 이랑이랑 푸르다. 슬레이트 집 담 모퉁이를 지나는데 톡톡톡 귀에 익은 소리가 난다.
아, 들깨 바심 중이다. 하얀 챙이 큰 모자를 쓴 할머니 한 분이 들깨 바심을 하고 있다. 밭두덕에 파란 천막 천을 넓게 펴놓고 앉아 마른 들깨 단을 막대기로 톡톡톡 치고 있다. 그 소리가 참 좋다. 마른 들깨 대가 털려난 들깨 껍질이 서로 부딪히며 가볍게 울려나는 소리가 귀에 솔깃하다. 가벼운 것들끼리 서로 부딪히며 속을 비워내는 가을소리 중에 이만한 소리가 있을까. 톡톡톡 들깨 바심 소리가 마음을 자꾸 비게 한다.
콩밭엔 콩잎이 노랗다. 콩잎 노란 콩대에 달린 콩 꼬투리도 벌써 놀밋하다. 따서 까볼 수는 없지만 모르기는 해도 꼬투리 속 햇콩도 가을볕에 노래지고 있겠다. 마을을 지나면 논벌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시골 초등학교가 앞을 가로막는다.
나는 돌아섰다. 약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며 한달음에 달려가 차를 몰았다. 차 안에 가을볕이 가득 들어와 따끈하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 따끈한 햇빛 열기가 좋다. 달려가는 내 눈앞으로 올 때에 보던 그 논벌들이 다시 나타나 내 발길을 잡는다. 아내에겐 안 된 일이지만 길옆 우묵한 곳에 간신히 차를 세웠다. 소원하던 논둑길에 들어섰다. 벼가 익는 논바닥이 말랐다. 벼는 익어도 논바닥에서 벼와 함께 큰 부레옥잠은 파란 꽃을 피우고 있다. 벼 이삭을 손으로 잡아본다. 알이 꼭 차 마찔하다. 쭉정이 하나 없이 알차다. 이 알찬 벼 한 알 한 알이 모여 샛노란 논벌을 만들어 낸 거다.
젊은 시절 아버지를 도와 하루 종일 벼 베던 일이 떠오른다. 때가 되면 작은 누나가 날라온 새참을 먹고, 점심을 먹고, 그 벼를 다 묶어 논두렁에 광이고 집에 돌아가면 고된 가을은 이내 컴컴해진다. 그때 아버지는 배추밭의 서리 맞은 알찬 배추 한 포기를 뽑아 오셨고, 그 저녁엔 흰쌀밥에 배추쌈을 싫도록 먹었다.
차를 세워둔 옆집 울타리엔 조생종 감이며 대추가 붉게 익고 있다. 빗돌에 새겨진 마을 이름이 하덕리다. 그 뒤에 칸나 꽃이 붉다. 마을 여기저기 장성한 은행나무며 느티나무, 굴밤나무가 거인처럼 서 있다. 우리나라 지명에 덕자가 들어있는 곳이 많다. 덕을 베풀려면 땅이 기름져야 한다. 하덕리 논벌이 유난히 황금빛인 이유를 그제야 알겠다.
집에 오니 아내는 내가 늦은 걸 알고 약국 찾기 어려웠어? 한다. 나는 응, 하고 얼버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