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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고궁서 만난 쇼팽

[이규섭 시인님] 고궁서 만난 쇼팽

by 이규섭 시인님 2020.11.06

깊어가는 가을, 덕수궁에서 쇼팽을 만났다. 지난 27일 낮 덕수궁 부근서 이른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매표구 앞에 여느 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게 아닌가. 평소 자주 들리는 터라 산책도 할 겸 들어가니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석조전을 향한다.
고궁 속 서양식 전각 석조전 앞에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한다. 연주는 5분간으로 짧았지만 여운은 길다. 마룻바닥인 석조전 내부에서도 연주가 이어졌다. 즉흥환상곡이 즉흥적으로 끝난 아쉬움을 유튜브(궁중문화 축전 제작)에 공개된 ‘아티스트가 사랑한 궁, 임동혁 편’영상을 통해 감동을 재확인했다.
‘즉흥환상곡’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쇼팽이 작곡한 4개의 즉흥곡 가운데 환상적인 분위기가 도드라진 곡이다. 악보 사이에 끼고 다니며 죽을 때까지 공개하지 않겠다고 할 만큼 아꼈던 곡이다.
쇼팽은 181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3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0여 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소나타를 남겼다. 섬세하고 화려한 피아노곡을 작곡하여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린다. 임동혁은 동영상에서 “대부분의 음악에는 비극적인 요소가 있어요. 사람도 누구나 비극 하나쯤은 품고 살잖아요”라고 밝혀 즉흥환상곡에 담긴 쇼팽의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을 암시한다.
쇼팽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 약혼자는 쇼팽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실의와 슬픔에 빠져 있던 그에게 소설가 조르주 상드가 위로해 주면서 둘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고무줄 같아 감정이 팽팽하게 부풀다가 느슨해지기도 하고 더러는 툭 끊어져 버리기도 한다. 어느 날 상드와 심하게 다투고 우울해할 때 찾아온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상드가 쇼팽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사과하자 용서하고 화해한다. 그 뒤 미묘한 사랑의 환상을 피아노로 풀어낸 곡이 ‘즉흥 환상곡’이다.
임동혁은 “즉흥 환상곡은 서정적이고 드라마틱 하고 환상적인 곡, 슬프지만 아름답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라고 소개한 뒤 연주한다. 전반부는 격정적이고 빠르다. 열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춤을 추듯 경쾌하다. 낙엽이 바람에 휩쓸려가는 듯하다. 중반부는 숨 고르기를 하듯 선율이 잔잔해진다. 벤치에 기대어 낙엽을 바라보며 사념에 젖듯 여유로운 선율이다. 후반부는 낙엽들이 양지바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듯 다시 빨라진다. 낙엽이 어깨를 비비며 사랑의 체온을 나누 듯 아름답고 포근하다.
임동혁은 마지막 멘트로 “언제나 좋은 날만 있을 수 없듯이 지금의 어려운 시기도 곧 지나갈 것입니다. 다들 저 같이 버티시고 음악으로부터 긍정적인 힘을 받으시면 좋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단이 주관하는 궁중음악축전은 올해로 6회째다. 그동안 궁궐을 배경으로 봄에 온·오프로 열렸으나 올해는 코로나로 가을(10월 10일∼11월 8일)에 열렸다. 비대면의 아쉬움을 유튜브 동영상에 담아 남겼다. 창덕궁 애련지에서 안숙선 명창이 부른 ‘사철가’는 동영상으로, 경복궁 경회루를 배경으로 펼친 판타지 ‘궁중연화’는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로 봤다. 깊어가는 가을의 멋진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