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나를 돌보는 여행
[권영상 작가님] 나를 돌보는 여행
by 권영상 작가님 2020.12.03
인도를 다녀온 지 28년이 됐다. 그때 나는 인도에서 돌아오며 언젠가 다시 인도를 찾으리라 했다. 그 무렵 내게 해외여행이란 꿈같은 일이었다. 직장이 있고, 가정이 있는 몸으로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건 지금이나 그때나 쉬운 게 아니었다.
첫 해외여행치고 대범하게 인도와 네팔, 한 달 여행을 선택했다. 뭄바이, 엘로라와 아잔타 석굴, 아그라, 델리, 우다이프르, 자이살메르, 라자스탄. 거기서 네팔.
그때 그 여행을 하면서 모 주간지에 ‘갠지스 가는 길’이라는 연재를 약속했다. 내가 준비한 건 카메라와 메모 수첩과 볼펜, 그게 전부였다. 나는 여행 내내 이야기가 될 듯한 것이면 놓치지 않고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인도를 거쳐 네팔 파슈파티나트 사원이 가까운 바그마티 강가에서다. 차가 다리를 건너 강가 근처에 도착할 무렵 화장터 가트에서 화장을 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라나시에서도 경험했지만 이 풍경은 두려움보다 어떤 신성함으로 나를 유혹했다. 나는 이 경이로운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걸음걸이를 늦추었지만 마음은 서둘렀다. 적당한 곳에서 셔터를 눌렀다.
그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젊은 네팔인이었다. 그는 내게 돈을 요구했고, 나는 그와 실랑이를 벌였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사내를 돌려세웠다. 가벼운 사건이었지만 이방인인 나는 심장이 뛰었다.
“이야기하고 싶으면 오늘 밤 나를 찾아오세요.” 좀 전, 사내를 돌아서게 한 이는 중년의 한국 남자였다.
그 밤, 나는 약속 장소를 찾아갔다. 카트만두의 ‘한국의 집’이었다. 그가 혼자 마살라 차이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대학교수였고, 사진작가였다.
“사진엔 시간의 흐름과 교감의 흔적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는 그 밤 사진의 기본을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도 바그마티 강가의 풍경을 찍으러 카트만두에 온 지 20일이 지났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사진 한 컷 못 찍은 것은 이 지점이 뿜어내는 낯설음 때문이라 했다. 한 장의 사진 속에는 그 이전과 이후를 관통하는 시간의 흐름과 친숙함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느라 그는 화장터 주변을 배회하며 그 근처에 서식하는 이들과 낯을 익히고, 그들의 만가며 그들의 죽음 이후의 세계관을 뜯어보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 나올 때 나는 좀 부끄러웠다. 바람처럼 쫓아가 후딱 찍고 돌아서던 한 달여간의 내 사진이 궁금했다. 거기엔 시간의 흐름은커녕 거기 사는 이들의 고된 삶과 삶에 대한 사유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게 분명했다.
늦었지만 그렇게 한 달간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며 제대로 된 단 한 컷의 사진을 위해 다시 인도에 가리라 했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 마음에 품은 곳이 남인도의 고야였다. 야자수로 둘러싸인 자유가 숨 쉬는 고야의 해변.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19가 세상을 덮치고 있는 때다. 가끔 지난날과 같은 자유로운 여행이 앞으로도 가능할까, 그런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백신도 백신이지만 이제 내게 다시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와는 다른 나를 돌보는 차분한 여행을 만들고 싶다.
코로나로 인해 항공사가 힘들어졌고, 현지 숙박업이며 현지 가이드들의 삶이 힘들어졌다는 소식을 접한다. 어쩌면 그들의 고통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또다시 나를 들추어 본다. 내가 꿈꾸는 고야로 가는 일이 나의 인생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
첫 해외여행치고 대범하게 인도와 네팔, 한 달 여행을 선택했다. 뭄바이, 엘로라와 아잔타 석굴, 아그라, 델리, 우다이프르, 자이살메르, 라자스탄. 거기서 네팔.
그때 그 여행을 하면서 모 주간지에 ‘갠지스 가는 길’이라는 연재를 약속했다. 내가 준비한 건 카메라와 메모 수첩과 볼펜, 그게 전부였다. 나는 여행 내내 이야기가 될 듯한 것이면 놓치지 않고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인도를 거쳐 네팔 파슈파티나트 사원이 가까운 바그마티 강가에서다. 차가 다리를 건너 강가 근처에 도착할 무렵 화장터 가트에서 화장을 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라나시에서도 경험했지만 이 풍경은 두려움보다 어떤 신성함으로 나를 유혹했다. 나는 이 경이로운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걸음걸이를 늦추었지만 마음은 서둘렀다. 적당한 곳에서 셔터를 눌렀다.
그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젊은 네팔인이었다. 그는 내게 돈을 요구했고, 나는 그와 실랑이를 벌였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사내를 돌려세웠다. 가벼운 사건이었지만 이방인인 나는 심장이 뛰었다.
“이야기하고 싶으면 오늘 밤 나를 찾아오세요.” 좀 전, 사내를 돌아서게 한 이는 중년의 한국 남자였다.
그 밤, 나는 약속 장소를 찾아갔다. 카트만두의 ‘한국의 집’이었다. 그가 혼자 마살라 차이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대학교수였고, 사진작가였다.
“사진엔 시간의 흐름과 교감의 흔적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는 그 밤 사진의 기본을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도 바그마티 강가의 풍경을 찍으러 카트만두에 온 지 20일이 지났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사진 한 컷 못 찍은 것은 이 지점이 뿜어내는 낯설음 때문이라 했다. 한 장의 사진 속에는 그 이전과 이후를 관통하는 시간의 흐름과 친숙함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느라 그는 화장터 주변을 배회하며 그 근처에 서식하는 이들과 낯을 익히고, 그들의 만가며 그들의 죽음 이후의 세계관을 뜯어보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 나올 때 나는 좀 부끄러웠다. 바람처럼 쫓아가 후딱 찍고 돌아서던 한 달여간의 내 사진이 궁금했다. 거기엔 시간의 흐름은커녕 거기 사는 이들의 고된 삶과 삶에 대한 사유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게 분명했다.
늦었지만 그렇게 한 달간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며 제대로 된 단 한 컷의 사진을 위해 다시 인도에 가리라 했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 마음에 품은 곳이 남인도의 고야였다. 야자수로 둘러싸인 자유가 숨 쉬는 고야의 해변.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19가 세상을 덮치고 있는 때다. 가끔 지난날과 같은 자유로운 여행이 앞으로도 가능할까, 그런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백신도 백신이지만 이제 내게 다시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와는 다른 나를 돌보는 차분한 여행을 만들고 싶다.
코로나로 인해 항공사가 힘들어졌고, 현지 숙박업이며 현지 가이드들의 삶이 힘들어졌다는 소식을 접한다. 어쩌면 그들의 고통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또다시 나를 들추어 본다. 내가 꿈꾸는 고야로 가는 일이 나의 인생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