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판권 교수님] 방심: 벼랑에 선 나무
[강판권 교수님] 방심: 벼랑에 선 나무
by 강판권 교수님 2020.12.07
마음은 인생의 나침반이다. 마음을 잃으면 길을 찾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 잃는 것을 방심(放心)이라 한다. 그래서 예부터 방심은 금물이라고 했다. 특히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방심하면 생존조차 불가능하다. 현재 인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이런 위기인데도 방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지금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추세도 겨울이라는 계절 탓만이 아니라 방심한 탓이 크다. 방심을 방지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집중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집중력을 잃고 방심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추세로 가면 인류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무를 통해 방심을 방지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산이나 계곡에는 벼랑에 선 나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나무들이 벼랑에 선 이유는 다양하다. 계곡에 사는 나무는 큰 비로 흙이 씻겨나가면서 대부분의 뿌리가 밖으로 나오면서 위기를 맞기도 하고, 산자락에 사는 나무는 산사태로 절개지가 생기면서 위기를 맞기도 한다. 어떤 나무들은 다른 나무와의 경쟁에 밀려 바위틈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나는 벼랑에 선 채로 살아가는 나무를 만나면 한참 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관찰한다. 얼마 전에는 경북 영천시 화북면에 위치한 옥간정과 횡계서당 주변에서 벼랑에 선 여러 그루의 나무들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한 그루 느티나무는 정말 위험천만한 위치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벼랑에 선 나무들은 자신이 왜 벼랑에 서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왜를 물을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우선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나무가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균형 잡기다. 균형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뿌리는 나무의 균형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뿌리 방향을 보면 나무가 어떻게 균형을 잡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뿌리는 나무의 기울기와 반대 방향으로 길게 혹은 깊게 뻗는다. 나무의 이러한 자세는 코로나19 시대의 인간에게도 절실하다.
현재 인간이 취해야 하는 태도는 벼랑에 선 나무처럼 생존을 위해 과감하게 그간의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태도를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분노한다.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행동이다. 아무리 우기고 분노해도 코로나19는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창궐할 것이다. 코로나19는 우기고 분노한다고 해서 사라질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기고 분노하는 대신 자신을 차분하게 돌아봐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달아나지 않도록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해결의 실마리나마 찾을 수 있다.
벼랑에 선 나무는 어떤 악조건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 현재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일이다. 코로나19는 다른 것과 달리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탓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아주 시급하다.
지금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추세도 겨울이라는 계절 탓만이 아니라 방심한 탓이 크다. 방심을 방지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집중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집중력을 잃고 방심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추세로 가면 인류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무를 통해 방심을 방지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산이나 계곡에는 벼랑에 선 나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나무들이 벼랑에 선 이유는 다양하다. 계곡에 사는 나무는 큰 비로 흙이 씻겨나가면서 대부분의 뿌리가 밖으로 나오면서 위기를 맞기도 하고, 산자락에 사는 나무는 산사태로 절개지가 생기면서 위기를 맞기도 한다. 어떤 나무들은 다른 나무와의 경쟁에 밀려 바위틈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나는 벼랑에 선 채로 살아가는 나무를 만나면 한참 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관찰한다. 얼마 전에는 경북 영천시 화북면에 위치한 옥간정과 횡계서당 주변에서 벼랑에 선 여러 그루의 나무들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한 그루 느티나무는 정말 위험천만한 위치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벼랑에 선 나무들은 자신이 왜 벼랑에 서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왜를 물을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우선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나무가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균형 잡기다. 균형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뿌리는 나무의 균형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뿌리 방향을 보면 나무가 어떻게 균형을 잡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뿌리는 나무의 기울기와 반대 방향으로 길게 혹은 깊게 뻗는다. 나무의 이러한 자세는 코로나19 시대의 인간에게도 절실하다.
현재 인간이 취해야 하는 태도는 벼랑에 선 나무처럼 생존을 위해 과감하게 그간의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태도를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분노한다.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행동이다. 아무리 우기고 분노해도 코로나19는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창궐할 것이다. 코로나19는 우기고 분노한다고 해서 사라질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기고 분노하는 대신 자신을 차분하게 돌아봐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달아나지 않도록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해결의 실마리나마 찾을 수 있다.
벼랑에 선 나무는 어떤 악조건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 현재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일이다. 코로나19는 다른 것과 달리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탓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아주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