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이미지

오피니언

오피니언

[한희철 목사님] 고수와 하수

[한희철 목사님] 고수와 하수

by 한희철 목사님 2020.12.23

감히 취미라 하기엔 머쓱하지만, 제가 이따금씩 관심을 갖는 것 중에는 바둑이 있습니다. 취미라 할 만큼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아니고, 바둑에 대한 이해나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둑을 접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이었는데, 형제들과 바둑을 두며 자란 덕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많이 했거나 급수를 확인하거나 기원을 찾을 만큼의 열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둑을 둔 지가 언제인가 싶게 까마득한 일이기도 하니, 겨우 돌이 가는 길을 어렴풋 알만큼의 지식밖에는 없는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을 좋아하고 관심을 거두지 않는 데에는 바둑만의 매력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바둑 안에는 평등과 자유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돌 하나의 가치가 동등합니다. 장기나 체스처럼 각자의 신분이 정해져 있거나, 신분에 따라 길을 가는 방식이 다르거나, 무엇 하나가 죽으면 게임이 끝나는 방식이 아닙니다. 돌 하나하나가 동등한 신분과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둑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은 자유입니다. 돌은 어디에 두어도 됩니다. 상변에 두어도 되고 하변에 두어도 되고 중앙에 두어도 되고 구석에 두어도 됩니다. 천한 것과 귀한 것이 영역으로 구분되지 않아, 그야말로 무한의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바둑을 다른 말로는 ‘수담’(手談)이라고 합니다.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는 뜻이지요. 말없이 마주 앉아 한 번씩 돌아가며 돌을 놓지만, 그러면서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수 한 수에는 그 돌을 놓는 사람의 마음이 담깁니다. 실리와 세력을 통한 균형이 어느 순간 깨어질 때, 굳이 그것을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돌 하나에 담긴 의미가 질문인지 양보인지 타협인지 싸움인지를 상대방은 말이 없어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가 있는 것이지요.
바둑에 있어 고수와 하수를 구분하는 기준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판을 보는 안목이 다릅니다. 하수는 한 부분만을 봅니다. 한 부분에 매달려 애를 씁니다. 그 결과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하지만, 게임에서 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전투에서는 이기지만 전쟁에서는 지는 셈이지요. 소리는 동쪽에서 내고 서쪽을 치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의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수는 다릅니다. 언제라도 판 전체를 봅니다. 돌 하나를 놓을 때에도 그 돌 하나가 판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하수와 고수를 구분하는 기준은 복기를 할 줄 아느냐의 여부입니다. 하수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고수는 바둑이 모두 끝났을 때 자기가 둔 돌은 물론 상대가 둔 돌까지를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그 돌을 하나씩 다시 놓아가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인생도 바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한다면 무엇이 고수와 하수를 구분하게 하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 해가 기우는 세밑의 시간은 복기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