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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이상한 설

[한희철 목사님] 이상한 설

by 한희철 목사님 2021.02.17

어릴 적 설날은 그야말로 손꼽아 기다리던 날 중의 하나였습니다. 가난했던 시절이지만, 설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온 동네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방앗간이 바빴지요. 이른 아침부터 시간이 제법 늦은 밤중까지 방앗소리가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열심히 돌아가며 서로의 동작을 연결시켜주던 피대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 방앗간 앞으로는 떡을 만들고 쌀을 빻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서곤 했습니다. 한 동네가 뽑아낸 가래떡 길이만으로도 지구를 서너 바퀴를 돌고도 남지 않았을까요? 어릴 적에 가졌던 기분으로 하자면 말이지요.
요즘도 가끔 그런 말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고기를 먹을 때면 말이지요. 요즘이야 고기를 먹는 일이 흔한 일이 되었지만, 어릴 적엔 달랐습니다. 고기는 자주 먹을 수도 없었고, 맘껏 먹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설날이 되면 떡국 위로 고기가 고명으로 올라 있곤 했습니다. 한 번에 삼키기가 아쉬워서 될 수 있으면 입안에서 오래 ○○○으며 그 맛을 즐기고는 했지요.
어릴 적엔 옷도 귀했습니다. 형이 입던 옷을 물려받아 더는 맞지 않아 못 입게 될 때까지 입을 만큼 입다가 다시 동생에게 물려주는, 당시의 옷이란 닳을 만큼 닳아 더 못 입을 때까지 형제 사이에서 대물림을 했습니다. 그러나 설날이 되면 달랐습니다. 설빔이라 해서 새로운 옷을 기대할 수가 있었으니까요. 부모님이야 없는 돈에 자식들 옷 하나씩을 사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자식들로서는 드문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설날 아침은 온 동네가 들썩이곤 했습니다. 세배는 집안 어른께만 드리지 않았습니다. 동네 어른들을 찾아가 세배를 드리는 일은 흔하고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호주머니에 조금씩 늘어나는 세뱃돈을 헤아리는 즐거움도 꽤나 쏠쏠했지요. 돈이 모아지면 사고 싶었던 물건값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어도 즐거움은 컸습니다.
곳곳에서 윷판이 벌어져 왁자지껄 웃음소리 골목마다 흔했고, 조금 크게는 씨름판이 벌어져 큰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널빤지를 멍석 위에 올려놓고 반대편 사람을 하늘 위로 날리는 널뛰기는 비슷한 것 같아도 유난히 잘 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높이기 위해서는 내가 한껏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널을 뛰면서 배웠던 것이지요.
동네 언덕에서는 연이 춤을 추곤 했습니다. 조금 어린 아이들은 날리기가 쉬운 가오리연을 택했고, 연 꽤나 날린 아이들은 보란 듯이 방패연을 날렸습니다. 꼬리를 달지 않은 방패연은 자랑스럽게 하늘을 날았고, 날렵하기가 수리에 버금갔습니다. 연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바라보는 이들의 손에도 땀이 배고는 했지요.
코로나19의 시간 속에서 맞은 설은 이상한 설이었습니다. 형제들과 통화를 하여 시간을 정했습니다. 서로 엇갈려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상한 설을 보내며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그토록 넉넉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 담긴 어릴 적 설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