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한 시대를 건너가는 만년필
[권영상 작가님] 한 시대를 건너가는 만년필
by 권영상 작가님 2021.02.18
책장 속 빈자리에 잉크병이 있다. 보면 보이는 자리인데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았다. 분명히 눈앞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아온 것은 오랫동안 내 손이 가지 않았다는 뜻이겠다. 30cc 짜리 블루 블랙 잉크가, 그것도 세 병이나 갑째 놓여있다. 오늘 보니 그 곁에 지금은 쓸 곳도 없는 플로피 디스켓 예닐곱 장도 쌓여있다.
한때는 없으면 못 살던 3.5인치 디스켓도 USB 메모리가 나오면서 한참 전에 밀려났다. 잉크는 어떠한가. 나는 잉크병을 내려 책상 위에 얹어본다. 왠지 잉크병 놓인 책상이 낯설다. 책들조차 묵은 책은 무리를 해가며 해마다 버리고 살았는데 이들은 용케 살아남았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연다.
서랍 안쪽에 만년필이 있다. 하나도 아니고 네 자루다. 지금도 명성을 지닌 회사 제품들이다. 예전엔 묵직한 만년필을 재킷 안주머니에 꽂고 다니면 마음이 든든했다. 여름날에도 와이셔츠나 남방셔츠에 만년필을 꽂고 다녔다. 그 무렵의 와이셔츠 윗주머니나 양복 재킷엔 잉크가 흘러나와 파랗게 얼룩지는 일도 있었다.
만년필은 종종 그런 실수를 했다. 아무리 명성 있는 만년필이라 해도 뽑아들고 글을 쓰려 하면 처음부터 글씨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몇 번 빈 종이에 헛글씨를 써서 잉크를 끌어내거나 아니면 만년필을 쥐고 책상 아래로 뿌려댔다. 그럴 때의 바닥을 보면 잉크가 뿌려져 별똥별 꽁지처럼 쪽 자국이 나 있었다.
그런 실수를 종종 저지르는데도 만년필을 쓰는 데엔 이유가 있다. 나름대로 잉크가 풍기는 격조와 신뢰와 멋이 있기 때문이다.
신간을 내고 지인들에게 책을 건넬 때 만년필 글씨로 해주는 사인은 멋있다. 그것이 멋있는 데엔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뽑고, 뚜껑을 열고, 만년필 몸통을 가지런히 잡는 일, 왼 손바닥을 펴 책장을 가벼이 눌러주고 쓰는 그 행위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인이 되신 김구용 시인께서 그 댁 무릎 책상 앞에 앉아 먹을 찍어 붓으로 사인을 해주시던 그 반듯하고 정갈하신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글씨를 대체로 소중히 다루는 시대였다.
나는 내 서랍 속 만년필 하나를 꺼낸다. 예전에 하듯 잉크병에 헤드를 넣어 튜브 가득 잉크를 담아낸다. 그리고 짧은 글을 써본다. 여전히 글씨 맛이 있다. 그윽한 잉크 냄새와 하얀 종이를 촉촉이 적셔나가는 검청색 글씨가 아늑한 정감을 살려낸다. 우리는 촉촉한 이 잉크 글씨에 오랫동안 신뢰를 보내며 만년필을 써왔다. 볼펜이나 연필처럼 잡히는 대로 급히 써 내려가는 성급함 보다 생각과 글씨가 함께 가는 그 찬찬함이 좋았다.
이 잉크병을 가까이 놓아두고 가끔 써볼까, 하지만 때 지난 일이다. 나의 모든 글쓰기는 볼펜이나 연필이 대신하고, 집 밖에선 휴대폰 메모장이 대신한다. 그리고 컴퓨터 한글 프로그램 속의 명조체를 통해 글은 완성된다. 그러니 가까이 두어봤자, 눈 밖에 날 게 뻔하다.
누군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만년필로 글을 쓰는 사람은 구세대 아닌가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아, 이제는 만년필도 도라지 위스키나 멋을 부리던 마담처럼 한 시대의 유물이 되어가는구나 싶었다. 글씨 한 자 한 자를, 자신의 이름 한 자 한 자를 소중히 적어나가던 시대는 멀리 갔다.
한 생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 앞을 지나가는 숱한 트렌드를 경험한다. 정감 있고 묵직한 만년필도 그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 사는 세상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한때는 없으면 못 살던 3.5인치 디스켓도 USB 메모리가 나오면서 한참 전에 밀려났다. 잉크는 어떠한가. 나는 잉크병을 내려 책상 위에 얹어본다. 왠지 잉크병 놓인 책상이 낯설다. 책들조차 묵은 책은 무리를 해가며 해마다 버리고 살았는데 이들은 용케 살아남았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연다.
서랍 안쪽에 만년필이 있다. 하나도 아니고 네 자루다. 지금도 명성을 지닌 회사 제품들이다. 예전엔 묵직한 만년필을 재킷 안주머니에 꽂고 다니면 마음이 든든했다. 여름날에도 와이셔츠나 남방셔츠에 만년필을 꽂고 다녔다. 그 무렵의 와이셔츠 윗주머니나 양복 재킷엔 잉크가 흘러나와 파랗게 얼룩지는 일도 있었다.
만년필은 종종 그런 실수를 했다. 아무리 명성 있는 만년필이라 해도 뽑아들고 글을 쓰려 하면 처음부터 글씨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몇 번 빈 종이에 헛글씨를 써서 잉크를 끌어내거나 아니면 만년필을 쥐고 책상 아래로 뿌려댔다. 그럴 때의 바닥을 보면 잉크가 뿌려져 별똥별 꽁지처럼 쪽 자국이 나 있었다.
그런 실수를 종종 저지르는데도 만년필을 쓰는 데엔 이유가 있다. 나름대로 잉크가 풍기는 격조와 신뢰와 멋이 있기 때문이다.
신간을 내고 지인들에게 책을 건넬 때 만년필 글씨로 해주는 사인은 멋있다. 그것이 멋있는 데엔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뽑고, 뚜껑을 열고, 만년필 몸통을 가지런히 잡는 일, 왼 손바닥을 펴 책장을 가벼이 눌러주고 쓰는 그 행위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인이 되신 김구용 시인께서 그 댁 무릎 책상 앞에 앉아 먹을 찍어 붓으로 사인을 해주시던 그 반듯하고 정갈하신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글씨를 대체로 소중히 다루는 시대였다.
나는 내 서랍 속 만년필 하나를 꺼낸다. 예전에 하듯 잉크병에 헤드를 넣어 튜브 가득 잉크를 담아낸다. 그리고 짧은 글을 써본다. 여전히 글씨 맛이 있다. 그윽한 잉크 냄새와 하얀 종이를 촉촉이 적셔나가는 검청색 글씨가 아늑한 정감을 살려낸다. 우리는 촉촉한 이 잉크 글씨에 오랫동안 신뢰를 보내며 만년필을 써왔다. 볼펜이나 연필처럼 잡히는 대로 급히 써 내려가는 성급함 보다 생각과 글씨가 함께 가는 그 찬찬함이 좋았다.
이 잉크병을 가까이 놓아두고 가끔 써볼까, 하지만 때 지난 일이다. 나의 모든 글쓰기는 볼펜이나 연필이 대신하고, 집 밖에선 휴대폰 메모장이 대신한다. 그리고 컴퓨터 한글 프로그램 속의 명조체를 통해 글은 완성된다. 그러니 가까이 두어봤자, 눈 밖에 날 게 뻔하다.
누군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만년필로 글을 쓰는 사람은 구세대 아닌가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아, 이제는 만년필도 도라지 위스키나 멋을 부리던 마담처럼 한 시대의 유물이 되어가는구나 싶었다. 글씨 한 자 한 자를, 자신의 이름 한 자 한 자를 소중히 적어나가던 시대는 멀리 갔다.
한 생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 앞을 지나가는 숱한 트렌드를 경험한다. 정감 있고 묵직한 만년필도 그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 사는 세상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