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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상 작가님] 배씨 아저씨의 봄농사

[권영상 작가님] 배씨 아저씨의 봄농사

by 권영상 작가님 2021.03.18

늦은 아침을 끝내고 일어설 때다. 문밖이 소란하다. 마을로 그릇장수가 찾아오는지, 이장님이 뭔 일이 있어 안내 방송을 하는지 확성기 소리가 들린다. 집의 안이 마을과 돌아앉아 있어 방송을 한대도 웅웅대기만하지 또렷하게 들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알겠다. 그릇장수도 마을 방송도 아니다. 커다란 밭갈이 농기계가 길 건너 고추밭을 갈아엎으며 우리 집 앞을 지나고 있다. 고추밭 배씨 아저씨다. 그이는 밭을 갈거나, 고춧대의 끈을 묶거나, 고추를 따거나 할 때 마누라처럼 꼭 데리고 다니는 게 있다. 메들리 유행곡이다. 밭갈이 기계에 오디오 확성기가 장착돼 있는 모양이다.
‘천태만상 인간 세상 사는 법도 가지가지. 귀천이 따로 있나.’
노랫소리는 그의 밭갈이 농기계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사는 법도 가지가지란 걸 보여주려는 듯 노래를 틀며 고추밭에 등장했다. 노랫소리가 요기 몇 안 되는 마을을 들었다 놨다 한다. 어쨌든 그 짱짱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났다.
나도 모르게 뜰마당에 나와 말라버린 꽃대궁이를 쑥쑥 뽑는다.
지난 토요일에 내려왔을 때 팔백쉰 평 고추밭에 거름을 쭉 펴놓았더니 오늘 갈아엎는다. 여기 내려와 산 지 올해로 8년이다. 그동안 배씨 아저씨는 그이의 늙으신 아버지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고추밭에 고추를 심었다. 그 바람에 나도 그이의 밭이 팔백쉰 평이란 걸 알았고, 그이 아버지께서 장기 두기를 좋아하신다거나 약주를 못 하신다는 것도 알았다.
농기계 뒤에 달린 6개의 밭갈이 기구가 늠실늠실 밭을 뒤집는다.
그 사이 배씨 아저씨는 운전석에 앉아 빠르고 흥겨운 메들리 곡들을 들으며 마치 적지를 점령해가는 군인처럼 도도히 기계를 몬다. 나는 갈퀴로 꽃밭에 내려앉은 마른 낙엽을 걷으며 배씨 아저씨가 몰고 가는 그 우람한 농기계를 바라본다. 그이가 나를 보든지 말든지 손을 들어 ‘안녕하세요!’ 인사를 보낸다.
그러고는 들썩거리는 노랫소리에 맞추어 방풍 밭의 마른 풀을 걷어주고, 못다 친 대추나무 가지를 잘라주고 그러며 봄 햇살을 즐기고 있을 때다. 요란하던 노랫소리가 뚝 끊기고 엔진만 부릉댄다. 고개를 돌렸다.
배씨 아저씨가 운전석에 앉아 나를 보며 와 달라고 손짓한다. 바쁜 그이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이가 몸을 아래로 길게 빼어 ‘마을에서 구했어요!’ 하며 비닐 봉다리를 건넨다.
머위 뿌리였다.
언젠가 머위 뿌리 사러 갔다가 못 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걸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칸을 쳐주지 않으면 온 밭에 번져나간다고 일러주었다. 어젯밤에 내려왔는데 내가 온 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차가 마당에 와 있길래 집 앞에 묻어둔 걸 꺼내왔지요, 하고는 엔진을 넣고 다시 확성기를 틀었다. 배씨 아저씨는 이 한적한 들판에 메들리 곡을 휘날리며 밭 코너를 빙 돌아 저쪽 아래로 내려간다.
지난 1월이다. 배씨 아저씨는 부친을 여의었다. 내가 여기 내려와 제일 먼저 얼굴을 익힌 분이 그이의 춘부장이다. 5월인데도 어쩐지 으스스한 날, 고추밭에 나와 일하시는 그분을 위해 따끈한 국과 술 한 병을 챙겨갔는데, 술은 못 해요, 그때 그분이 그러셨다.
근데 그분께서 팔백쉰 평 고추밭을 두고 가셨다. 고추 딸 때면 그분의 아들인 배씨 아저씨가 틀어놓은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거야!’를 들으며 늦도록 일을 하시던 분이다.
갑자기 메들리 곡이 뚝 끊긴다. 밭갈이가 다 끝난 모양이다. 이제 봄 농사도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