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바보 수탉
[권영상 작가님] 바보 수탉
by 권영상 작가님 2021.04.15
평소보다 좀 일찍 잔 게 화근이다. 아닌 밤중에 잠에서 깼다. 이럴 때 시계를 보면 다시 잠들기 어렵다. 그런데 그만 무심코 시계를 봤다. 새벽 두 시 반. 시계를 본 탓일까. 잠잔 시간을 손꼽아보는 사이 잠이 싹 달아났다.
잠들기 위해 애쓰느니,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꼬끼오오오꼬오오!
난데없이 수탉 울음소리다. 요 앞, 길 건넛집 수탉이다.
시계를 다시 봤다. 분명 두 시 반이다. 수탉이 그 장대한 목청으로 다시 운다. 야심한 밤. 수탉 울음소리가 요 몇 집 안 되는 동네를 쩌렁쩌렁 울린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새벽이 오려면 멀었다. 세 시나 네 시라면 혹 모를까 아닌 밤중에 닭이 운다. 어쩌다 실수로 한두 번 우는 게 아니라 수차례 운다.
길 건넛집에 풀어놓고 기르는 닭이 있다. 네 마리의 햄프셔 암탉과 볏이 붉은 흰색 레그혼 수탉이다. 그들은 대개 아침에 문을 열어주면 닭장에서 나와 울타리 너머 아직은 빈, 넓은 고추밭을 휘돌아다니며 울고 먹고 한다. 그럴 때에도 수탉은 아침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울고 싶은 대로 울어젖힌다.
어제다. 빈 밭에 거름을 펴고 삽으로 밭을 뒤집고 있을 때다. 수탉이 또 요란하게 울어댔다.
“요놈의 새끼, 시끄럽게 왜 울어! 왜 울어!”
그러는 사내 목소리와 함께 비명을 질러대는 닭소리가 났다.
건너다보니 건넛집 남자다. 토요일이라 출근을 하지 않은 그 집 남자 주인이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닭 울음을 참을 수 없었던지 작대기를 휘두르며 수탉을 쫓고 있었다.
나는 킥킥거리며 혼자 웃었다.
웃다가 생각해 보니 근처에 사는 이웃들을 의식해 그러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주인 남자의 성화에 닭들은 겅중겅중 뛰다가 날다가 고꾸라지다가 푸드덕대다가 결국 울타리를 넘어 고추밭으로 달아났다.
한동안 동네가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수탉은 여전히 그 보기 좋은 목청으로 길게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닭의 본성을 막대기로 위협한다고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한밤중에 우는 수탉이 바로 그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수탉이다.
두 시 반 무렵에 한차례 울다가 그친 닭 울음소리는 또다시 들렸다. 시계를 봤다. 세 시가 조금 넘었다. 새벽이라 말하기엔 아직도 이르다면 이른 시각이다. 실수로 또 저러나 했지만 아니다. 흔히 새벽닭이 울듯 한동안 길게 운다.
‘바보 수탉 아냐? 새벽빛을 알아채지 못하는.’
이번엔 내가 수탉을 탓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바보 수탉을 만드는 게 어쩌면 가로등불 같았다. 요 작은 동네에 가로등만 세 개다. 거기다 밤새도록 외등을 켜는 집들도 있다. 그러니 밤은 늘 환하다. 이 환한 밤에 수탉이 새벽빛을 찾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수탉으로 보자면 자정을 넘긴 두 시도 새벽 같고, 세 시도 새벽같이 환하다.
새벽 직감을 방해하는 이 불빛들 때문에 수탉은 혼란스럽다. 그것은 수탉만일까. 코로나 예방 접종 이후의 상황 또한 어떻게 될지 혼란스럽고, 점점 불행의 방향으로 빠져드는 듯한 세계가 우리를 또 혼란스럽게 한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의 새벽을 직감하지 못하는 바보 수탉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새벽이 멀었는데도 수탉은 여전히 운다.
잠들기 위해 애쓰느니,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꼬끼오오오꼬오오!
난데없이 수탉 울음소리다. 요 앞, 길 건넛집 수탉이다.
시계를 다시 봤다. 분명 두 시 반이다. 수탉이 그 장대한 목청으로 다시 운다. 야심한 밤. 수탉 울음소리가 요 몇 집 안 되는 동네를 쩌렁쩌렁 울린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새벽이 오려면 멀었다. 세 시나 네 시라면 혹 모를까 아닌 밤중에 닭이 운다. 어쩌다 실수로 한두 번 우는 게 아니라 수차례 운다.
길 건넛집에 풀어놓고 기르는 닭이 있다. 네 마리의 햄프셔 암탉과 볏이 붉은 흰색 레그혼 수탉이다. 그들은 대개 아침에 문을 열어주면 닭장에서 나와 울타리 너머 아직은 빈, 넓은 고추밭을 휘돌아다니며 울고 먹고 한다. 그럴 때에도 수탉은 아침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울고 싶은 대로 울어젖힌다.
어제다. 빈 밭에 거름을 펴고 삽으로 밭을 뒤집고 있을 때다. 수탉이 또 요란하게 울어댔다.
“요놈의 새끼, 시끄럽게 왜 울어! 왜 울어!”
그러는 사내 목소리와 함께 비명을 질러대는 닭소리가 났다.
건너다보니 건넛집 남자다. 토요일이라 출근을 하지 않은 그 집 남자 주인이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닭 울음을 참을 수 없었던지 작대기를 휘두르며 수탉을 쫓고 있었다.
나는 킥킥거리며 혼자 웃었다.
웃다가 생각해 보니 근처에 사는 이웃들을 의식해 그러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주인 남자의 성화에 닭들은 겅중겅중 뛰다가 날다가 고꾸라지다가 푸드덕대다가 결국 울타리를 넘어 고추밭으로 달아났다.
한동안 동네가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수탉은 여전히 그 보기 좋은 목청으로 길게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닭의 본성을 막대기로 위협한다고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한밤중에 우는 수탉이 바로 그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수탉이다.
두 시 반 무렵에 한차례 울다가 그친 닭 울음소리는 또다시 들렸다. 시계를 봤다. 세 시가 조금 넘었다. 새벽이라 말하기엔 아직도 이르다면 이른 시각이다. 실수로 또 저러나 했지만 아니다. 흔히 새벽닭이 울듯 한동안 길게 운다.
‘바보 수탉 아냐? 새벽빛을 알아채지 못하는.’
이번엔 내가 수탉을 탓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바보 수탉을 만드는 게 어쩌면 가로등불 같았다. 요 작은 동네에 가로등만 세 개다. 거기다 밤새도록 외등을 켜는 집들도 있다. 그러니 밤은 늘 환하다. 이 환한 밤에 수탉이 새벽빛을 찾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수탉으로 보자면 자정을 넘긴 두 시도 새벽 같고, 세 시도 새벽같이 환하다.
새벽 직감을 방해하는 이 불빛들 때문에 수탉은 혼란스럽다. 그것은 수탉만일까. 코로나 예방 접종 이후의 상황 또한 어떻게 될지 혼란스럽고, 점점 불행의 방향으로 빠져드는 듯한 세계가 우리를 또 혼란스럽게 한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의 새벽을 직감하지 못하는 바보 수탉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새벽이 멀었는데도 수탉은 여전히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