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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박사님] 이 빠진 벼룻돌

[김민정 박사님] 이 빠진 벼룻돌

by 김민정 박사님 2021.04.19

바짝 마른 연지 속에 그때 그 눈물 자국
격랑이 자꾸 일어 숨결 검게 짙어질 때
웅크린 / 사자 한 마리 / 포효할 듯 꿈틀댄다.

바위 절벽 뚫고 솟아 구부정 휘어진 촉
푸른 하늘 찌를 듯이 곧추 뻗는 삼전지묘三轉之妙**
울컥한 울분을 모두 / 거기 쏟은 석파였나.

온몸의 피를 녹인 불같은 적막 속에
이 빠진 저 벼룻돌 뜨겁게 달아올라
먹물 빛 / 바람 붙들고 / 목 붉은 울음 터뜨린다.
- 배종도, 「이 빠진 벼룻돌* - 석파 石坡, 일어서다」 전문

*석파(흥선대원군)는 불우했던 시절 도포 자락에 지필묵과 함께, 사자 그림이 새겨진 작은 벼루를 가지고 다니며 특기인 난초를 그려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난 잎이 세 번 자연스럽게 휘어져 돌아가는 모습을 붓으로 묘사하는 기법.

이 작품은 흥선대원군이 지녔던 벼루를 보고 쓴 작품이다. 둘째 수는 그 벼루로 멋진 난초 작품을 만들어내며 울분을 달래던 흥선대원군의 모습이다. ‘바위 절벽 뚫고 솟아 구부정 휘어진 촉/ 푸른 하늘 찌를 듯이 곧추 뻗는 삼전지묘三轉之妙’라며 흥선대원군의 난초 작품에 대한 평가다. 그는 난초 그림을 잘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첫째 수와 셋째 수는 이 빠진 벼룻돌을 보며 ‘바짝 마른 연지 속에 그때 그 눈물 자국’을 생각하고, ‘먹물 빛/ 바람 붙들고/ 목 붉은 울음 터뜨린다’는 표현으로 당시의 역사를 조명해 보고 있다. 유물인 벼루를 보며 당시 흥선대원군의 답답함, 울분 등 조선말 역사인식이 드러나 깊이가 느껴지는 훌륭한 작품이다.
양산 통도사 입구의 ‘일주문(一株門)과 금강계단(金剛戒壇)’이 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그는 김정희로부터 서화를 배워 특히 난을 잘 그려서 석파란(石坡蘭)이라 할 만큼 서화가 유명하다.
왕족이면서도 세도정치에 밀려서 안동 김씨들로부터 수모를 겪으며 살던 그는 18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묻었으나, 식객이자 이름난 지관인 정만인으로부터 가야산 북쪽에 2대 천자지지가 있고, 남쪽 오서산 아래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만대영화지지가 있다고 하자, 만대 부귀영화보다 2대 천자지지를 선택한 뒤 직접 현지를 답사해 보니 그곳은 공교롭게도 가야사 5층 금탑이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1840년 정치적 야심이 컸던 이하응은 가야사를 불태운 뒤 경기에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기로 했다 한다. 그는 가까이 지내던 판서 김병학을 찾아가 그가 좋아하는 난을 그려주고, 그 대가로 김병학이 가보로 전해오는 벼루를 얻어서 영의정 김좌근에게 선물로 주고 충청감사에게 가야사를 흥선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쓰는데 협조해 주라는 편지를 받아들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본명은 이하응이다. 호는 석파, 또는 해동거사이다. 조선 제26대 고종의 아버지로 외국 문물에 반대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한 정치가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고종의 아명)이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서세동점이라는 새로운 세계사적 흐름과 세도정치로 피폐한 국가의 재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했던 흥선대원군은 오늘날 한편에서는 개혁 정치가로, 한 편에서는 보수적인 국수주의자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