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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씨감자가 된 사람들

[한희철 목사님] 씨감자가 된 사람들

by 한희철 목사님 2021.05.20

지난봄, 오랜만에 들밥을 먹었습니다. 모처럼 찾은 강원도 작은 마을에 가까이 지내는 지인이 마침 감자를 심는 날, 밥을 같이 먹자고 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손님이 있었지만, 넉넉한 인심은 상관이 없어 함께 감자 심는 밭을 찾아갔습니다.
들밥을 먹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전에야 농촌 일의 대부분이 품앗이였고, 한 번 일을 하면 일꾼이 한 둘이 아니어서 아예 들에서 밥을 짓고는 했습니다. 새참이든 점심이든 잠깐 일손을 멈추고 땅바닥에 편하게 둘러앉아 먹는 들밥은 어느 고급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도 맛이 좋았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두 분은 당신들 팔십 평생에 처음 먹는 들밥이라며 귀한 마음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 이어지는 일, 지금은 감자 심는 모습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일일이 호미질을 해서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에 씨감자를 심고, 다시 흙으로 덮고, 손이 여간 많이 가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지금은 심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미리 덮어놓은 검은 비닐 구멍에 긴 깔때기처럼 생긴 도구로 땅을 찍으면 얼른 도구의 입구에 씨감자를 넣는데, 그러면 통로를 따라 감자가 땅으로 내려갑니다. 그런 뒤에 도구를 다시 원위치 하면 흙이 감자를 덮는 방식이었습니다. 일일이 손으로 하던 몇 가지 과정을 간단한 도구로 한 번에 마치는 방식이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을 보니 낯설게 여겨지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몽고인지 태국인지 필리핀인지는 몰라도 멀리서 온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갈수록 농촌에 일손이 달리다 보니 이제는 외국 노동자의 손이 없으면 농사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그들에게 지불하는 품삯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한 조가 되어 검은 강처럼 흐르는 비닐 물결을 따라 익숙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따로 식사를 했습니다. 따로 모여 따로 가지고 온 음식을 펼쳐 놓고 그들만의 언어로 크게 말하고 웃으며 밥을 먹었습니다. 말없이 일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심고 있는 것은 씨감자입니다. 씨감자는 땅에 심겨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굵은 알들을 매달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썩어가면서도 튼실한 감자를 키울 것입니다.
저들이야말로 씨감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구들을 떠나 낯선 땅을 찾은 것은 나는 고생하더라도 가족을 살리겠다는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뙤약볕 아래 땀을 흘리고, 음식이 맞지 않아 식사조차도 따로 하고, 잠자리가 불편하다 해도, 그 모든 불편을 감내하는 것은 오직 하나, 내가 희생해서 가족들을 살리겠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볼 때 마음이 더욱 뜨거워졌던 것은, 바로 그들의 모습 속에 우리를 키워주신 부모님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