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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명예 없는 명예수당

[이규섭 시인님] 명예 없는 명예수당

by 이규섭 시인님 2021.07.02

그는 지난 유월이 유난히 바빴다. 6·25전쟁과 관련된 참전과 보훈에 관련된 증언을 들으려는 전화가 밀물져 왔다. 퇴직 언론인 단체 박기병 회장 이야기다. 그는 우리 나이로 아흔인데 6·25참전언론인회 회장까지 겸해 활동 반경이 넓다.
올 6월에는 국무총리 표창장과 상승칠성부대(제7보병사단) 감사장도 받았다. 6·25전쟁 참전언론인들의 참전기록을 엮은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를 출판하고 전방부대 시찰 등 호국보훈정신을 선양해 왔다. 상승칠성부대 감사장은 6·25전쟁 당시 제7보병사단에서 헌신한 공로다.
그가 춘천 교대에 다니던 시절 6·25전쟁이 일어났다. 춘천대첩 땐 학도병으로 포탄을 날랐다. 춘천대첩은 인민군이 춘천을 점령한 뒤 가평을 거쳐 서울을 포위하려는 작전으로 이를 봉쇄한 혈전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군은 화천과 양구에서 춘천으로 진격하여 점령하려던 작전이다. 춘천대첩은 6·25전쟁 중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방어작전과 함께 3대 전승 작전 기록이다.
그는 백석산 전투에도 참여했다. 6·25전쟁 최대 격전지로 꼽힌다. 1951년 8월 18일부터 10월 28일까지 중공군 611연대와 북한 인민군 12사단 및 32사단과 맞서 국군 7사단이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여 적군을 서운산 방면으로 퇴각시킨 전투였다. 단 한 평의 땅이라도 점령하기 위한 백병전으로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적군이 고지를 차지하는 일진일퇴의 접전이었다. 포병 16대대와 미 96포병부대의 화력전으로 인민군과 중공군을 후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전사자는 244명, 적군 사살은 1460명에 이르는 혈전이었다. 백석산 전투의 공로로 1953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젠 모든 걸 내려놓고 여생을 여유 있게 보내야 할 연세에 늘 두 가지를 걱정한다. 젊은 세대들이 참혹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을 까맣게 잊고 산다는 게 불만이다.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 목숨 걸고 획득한 자유와 평화의 고마움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아쉬워한다. 이념 편향적인 안보정책도 못마땅하다.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6·25참전용사에게 주는 참전수당의 현실화를 요구해 왔다. 생존한 6·25참전용사는 대부분 90대로 병마와 생활고를 겪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보훈처가 1인당 참전명예수당을 월 34만 원 지급하고 있지만 대부분 기저질환에 시달리며 약값으로 나간다. 참전 유공자가 전국에 6곳뿐인 보훈병원 등 위탁 병원에 가면 진료비 90%를 지원해 주지만 혜택받으려면 어려움이 따른다. 65세 이상 국민건강보험 가입자는 동네의원에서 진료비 1만 5000원 이하는 1500원만 낸다. 국가유공자가 아니라도 65세 넘으면 고궁, 국·공립 박물관 등 입장료가 무료니 특별한 혜택이랄 수 없다.
현역 상병의 월급은 54만 9200원이다. 참전용사 수당은 병장 60만 8500원의 절반 수준이다. 이러고도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6·25전쟁기념식에서 말로만 생색을 낸다. 박 회장은 관계 기관장을 만나 수당의 현실화를 제의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예산 부족이라고 한다. 민주화 유공자 예우법은 만들려고 하면서 나라를 지킨 노병들의 예우엔 왜 이렇게 인색한가. 6·25 때 나라를 지킨 유공자들은 이제 26만 여명 남았고 매년 2만 명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