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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허름한 궤짝에서 나온 고전

[한희철 목사님] 허름한 궤짝에서 나온 고전

by 한희철 목사님 2021.08.06

시골집에 가면 한쪽 구석에 허름한 궤짝이 놓여 있습니다. 오래전 마을 사람이 불태워 버리려는 것을 혹시 쓸모가 있을까 싶어 얻어다 놓은 볼품없는 궤짝입니다. 시골집 살림이 워낙 어수선하기 마련이지만, 궤짝 위로는 이런저런 허드레 물건이 쌓여 보기에도 좋을 것이 없었습니다.
궤짝 옆으로 어지럽게 쌓인 장작을 정리하는 김에 궤짝을 치우기로 했습니다. 궤짝 위에 올려놓은 물건을 정리한 뒤에 궤짝 문을 열었습니다. 여닫이로 되어 있는 문은 신발 끈을 못에 걸어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열어보는 궤짝 안에는 이런저런 물건들이 들어있었습니다. 비닐봉지 안에는 적지 않은 양의 숯이 담겨 있었고, 번개탄, 부탄가스통, 문을 바르다 남은 창호지, 배드민턴 라켓 등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오래된 먼지가 가득했고요.
물건을 다 빼낸 뒤 궤짝을 살펴보았습니다. 사과궤짝보다 조금 큰 궤짝은 흔한 널빤지로 만들어 가벼웠습니다. 궤짝은 겹겹이 바른 종이로 감싸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궤짝 안에도 종이를 발라 놓았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벽지, 종이는 종이대로 뜯어내고 나무판자는 나무대로 뜯어내기로 했습니다.
종이는 신문지와 시멘트 포장지, 그리고 벽지 등으로 겹겹이 붙어 있어 그 두께가 제법이었습니다. 궤짝 밖의 종이를 뜯어낸 뒤 안쪽에 붙인 종이를 뜯어내기 시작하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뜯어낸 종이 속에서 생각하지 못한 것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온통 한문이 적혀 있는 종이였습니다. 한문은 분명 책에서 뜯어냈지 싶은 오래된 한지에 적혀 있었습니다. 갑자기 종이를 뜯어내는 손길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누가 허름한 궤짝에 종이를 붙이며 옛글이 담긴 종이를 쓸 생각을 했을까, 종이를 찾다가 책을 뜯어냈을까, 재미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지는 곳곳에 좀이 심하게 슬기도 했고, 신문지와 시멘트 포장지와 붙어 있어서 제대로 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조심스럽게 분리를 한 뒤, 한지를 펼쳐놓고 적힌 글을 살펴보았습니다.
‘論語 集註’(논어 집주)라는 글자가 눈에 띕니다. 이어지는 성한 문장 중에는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부자언불학 이역하상사지유)가 있습니다. <논어> 자장편에 나오는 한 구절로 ‘우리 선생님이 어디선들 배우지 않았겠으며, 그러니 어찌 정해진 스승이 있었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자네의 스승은 어디에서 배웠느냐고 묻는 위나라의 공손조에게 자공이 대답한 말로, 선생님은 모든 것에서 배웠다고, 그러니 스승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대답한 대목입니다.
허름한 궤짝에서 나온 고전의 한 대목이 그윽하게 다가옵니다. 모든 것에서 배울 마음이 있다면 따로 스승이 없어도 좋다는 넉넉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허름한 궤짝 안에도 고전이 숨어 있었으니 배울 마음만 있다면 모두가 스승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