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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판권 교수님] 봉오동: 봉새와 오동나무 사는 마을

[강판권 교수님] 봉오동: 봉새와 오동나무 사는 마을

by 강판권 교수님 2021.08.23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영웅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의 유해가 서거 78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홍범도 장군 같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온 날 눈물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을 것이다.
장군은 1920년 6월 최진동과 함께 만주의 간도(間島)와 맞닿아 있는 종성(鍾城) 삼둔자(三屯子) 부근에서 국경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했으며, 두만강 대안(對岸)의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키는 큰 성과를 올렸다. 봉오동전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봉오동전투의 ‘봉오동’은 수컷인 봉새와 오동나무가 사는 동네라는 뜻이다. 봉새는 상상의 새이고, 오동나무는 현삼과의 갈잎큰키나무이다. 우리나라에는 봉오동전투가 일어난 곳만이 아니라 전국 여러 곳에 같은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봉새가 희망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오동나무를 심은 것은 봉새가 이곳에만 앉아 오로지 죽을 때 꽃을 피우는 대나무 열매만 먹기 때문이다. 홍범도가 이곳에서 일본군을 처참하게 격파해서 그와 대한민국의 꿈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장군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돌아가셨고, 평양에서 머슴살이하던 아버지가 9살 때 돌아가시는 등 어린 시절부터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삶을 보냈다. 장군은 나라의 독립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코자 했다. 봉오동전투는 바로 장군이 꿈을 실현하고자 목숨을 건 전투였다.
봉새는 상상의 새이지만 실존하는 오동나무에 앉아서 대나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 장군은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현실 속에서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싸워 대한독립을 염원했다. 그러나 장군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지만,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더욱이 봉오동전투가 일어난 지 1세기 만에야 조국의 품에 안겼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장군이 이역만리 차가운 땅에 묻혀 있는 동안 나는 장군을 잊은 채 따뜻한 곳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다.
가장 안락할 때 가장 위험한 순간이 다가오는 법이다. 장군은 가장 위험한 봉오동전투에서 희망의 화살을 쏘았다. 봉오동전투에 참가한 독립군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으면서 나라의 독립이라는 가장 높은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민은 유사 이래 아주 힘든 시간을 맞고 있지만, 장군의 삶에 비하면 편안한 삶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장군의 삶을 생각하면 우리 모두 고통의 순간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이 정도의 어려움조차 극복하지 못하면 부끄러워서 봉오동전투를 비롯해 독립에 목숨을 건 영웅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고통의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서 대의보다는 자신만의 이익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눈앞의 이익을 쫓으면 미래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아주 높다. 위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화(人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만 누구나 고대하고 있는 대면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