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은 대표님] 가을장마
[김재은 대표님] 가을장마
by 김재은 대표님 2021.08.30
겨울엔 고드름이 매달리던 슬레이트집 처마 끝의 골을 따라 비가 줄지어 내린다.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른다.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가 ‘뭔 놈의 비가 그칠 줄을 모른댜~’하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돌아선다. 어두침침한 집안이 오늘따라 더욱 눅눅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살짝 우울하다.
50여 년 전 고향집 풍경이다. 아니 그랬을 것 같다.
작년의 기록적인 장마에 비하면 올해는 스치듯 지나갔으니 장마가 아니라 ‘단마’가 어울릴 듯했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가을장마란다. 그냥 지나가기 서운했나 보다. 처서가 지났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는데 장마라니. 늦장마라고 해도 되는데 가을장마라 하는 걸 보니 장마에 낭만이라도 한 줌 얹고 싶었나 보다.
사실 장마는 두 거대 기단의 전쟁터라 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대치상태가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위쪽의 차가운 공기덩어리(오호츠크해 기단)와 아래쪽의 무더운 기단(북태평양 기단)의 힘이 팽팽할 때 서로 힘들어 흘리는 땀과 눈물이 장마이니까. 아니 그리운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 흘리는 기쁨의 눈물인지도 모르겠다.
장마 초기엔 아래쪽 공기덩어리의 힘이 세서 밀고 올라오다가 나중엔 반대가 되어 밀려나게 된다. 장마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번 장마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시작된 전쟁 같은 것이다. 다 꺼진 불씨가 되살아난 것이다.
어쨌거나 언제부터인가 장마가 사라진 것 같았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장마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니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다.
장마와 눈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언제 눈물을 흘리며 울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가을장마가 지난 여름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의 눈물이라면 나 또한 지난 삶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지금 이대로 좋은 삶을 누리고 있음에 고마움의 눈물을 흘려도 좋을 것 같다.
우리네 사회가 메말라가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은 어쩌면 ‘눈물의 실종’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체면, 형식, 눈치 보기 등등을 다 내려놓고 누군가의 기쁨과 아픔에 진정으로 함께 우는 것만큼 가슴 벅찬 일이 또 있을까. 그냥 그대로 내 앞의 ‘그 사람’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며 진심 어린 속마음을 내보인다면 삶이 얼마나 따뜻해질까.
찰나 같은 인생, 우리는 뭐 그리 할 게 많다고 ‘제대로 한 번 울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나를 위해서든 다른 사람을 위해서든 울어보지 못한 사람이 인생의 참 맛을 알기나 할까. 무엇보다 ‘울고 웃는’ 자유를 누릴 때 진정한 삶의 기쁨이 올 것이 틀림없는데.
처서가 지나고 백로가 다가오는 즈음의 장마는 환영받기 어려운 불청객이다. 우리 조상들은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무리 낭만적인 비라고 해도 ‘가을장마야! 어여 물러가라’고 외치고 싶다. 대신 우리네 삶에 가을장마 같은 ‘눈물 나눔’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혼자서든 서로 얼싸안든 실컷 울다 보면 마음속의 미움과 원망의 응어리가 풀리고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새로운 삶을 맛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번 가을장마와 보조를 맞춰 나랑 같이 울 사람, 어디 있을까?
50여 년 전 고향집 풍경이다. 아니 그랬을 것 같다.
작년의 기록적인 장마에 비하면 올해는 스치듯 지나갔으니 장마가 아니라 ‘단마’가 어울릴 듯했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가을장마란다. 그냥 지나가기 서운했나 보다. 처서가 지났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는데 장마라니. 늦장마라고 해도 되는데 가을장마라 하는 걸 보니 장마에 낭만이라도 한 줌 얹고 싶었나 보다.
사실 장마는 두 거대 기단의 전쟁터라 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대치상태가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위쪽의 차가운 공기덩어리(오호츠크해 기단)와 아래쪽의 무더운 기단(북태평양 기단)의 힘이 팽팽할 때 서로 힘들어 흘리는 땀과 눈물이 장마이니까. 아니 그리운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 흘리는 기쁨의 눈물인지도 모르겠다.
장마 초기엔 아래쪽 공기덩어리의 힘이 세서 밀고 올라오다가 나중엔 반대가 되어 밀려나게 된다. 장마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번 장마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시작된 전쟁 같은 것이다. 다 꺼진 불씨가 되살아난 것이다.
어쨌거나 언제부터인가 장마가 사라진 것 같았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장마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니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다.
장마와 눈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언제 눈물을 흘리며 울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가을장마가 지난 여름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의 눈물이라면 나 또한 지난 삶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지금 이대로 좋은 삶을 누리고 있음에 고마움의 눈물을 흘려도 좋을 것 같다.
우리네 사회가 메말라가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은 어쩌면 ‘눈물의 실종’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체면, 형식, 눈치 보기 등등을 다 내려놓고 누군가의 기쁨과 아픔에 진정으로 함께 우는 것만큼 가슴 벅찬 일이 또 있을까. 그냥 그대로 내 앞의 ‘그 사람’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며 진심 어린 속마음을 내보인다면 삶이 얼마나 따뜻해질까.
찰나 같은 인생, 우리는 뭐 그리 할 게 많다고 ‘제대로 한 번 울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나를 위해서든 다른 사람을 위해서든 울어보지 못한 사람이 인생의 참 맛을 알기나 할까. 무엇보다 ‘울고 웃는’ 자유를 누릴 때 진정한 삶의 기쁨이 올 것이 틀림없는데.
처서가 지나고 백로가 다가오는 즈음의 장마는 환영받기 어려운 불청객이다. 우리 조상들은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무리 낭만적인 비라고 해도 ‘가을장마야! 어여 물러가라’고 외치고 싶다. 대신 우리네 삶에 가을장마 같은 ‘눈물 나눔’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혼자서든 서로 얼싸안든 실컷 울다 보면 마음속의 미움과 원망의 응어리가 풀리고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새로운 삶을 맛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번 가을장마와 보조를 맞춰 나랑 같이 울 사람,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