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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은 대표님] 이골이 난다는 것

[김재은 대표님] 이골이 난다는 것

by 김재은 대표님 2021.09.14

오래전 기억의 저편에 있는 희미한 추억 하나를 떠올린다. 일곱 식구가 작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때, 손바닥만 한 뒤뜰에 모시풀이 있었다. 일부러 심은 건지 아니면 씨앗이 날아와 자란 것인지 기억은 없지만.
그때는 옷감 모시를 짜기엔 너무 적어 주로 모시떡을 해 먹었다. 가난한 시절이라 그것조차도 그리 풍족하지는 않아 가뭄에 콩 나듯 했지만 말이다. 세월이 흘러 언제인가 영광 모시떡을 만났을 때 ‘맞아, 어렸을 때 먹었던 그 모시떡이네’ 하며 반겼던 기억도 난다.
그 모시가 고향 인근의 금강 너머 한산의 명물이라는 것을 일찍이 책을 통해 알았지만 실제로 모시를 보러 가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나의 게으름 탓이다. 예부터 여름철 최고의 전통 옷으로 각광받아 온 한산 모시옷이 있듯이 모시는 삼베와 더불어 신라시대부터 민초들의 옷감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옷감뿐 아니라 모시떡 등 식재료로도 사용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고마운 모시이다.
하지만 모시가 옷감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성인 옷 한 벌을 만들 수 있는 모시 한 필을 짜는 데 아낙 한 사람이 다른 일은 제쳐두고 넉 달 동안은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한다. 모시짜기가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예다. 보릿고개 시절, 때로는 초근목피로 연명할 정도로 궁핍할 때 모시 한 필이라도 짜야 살아갈 수 있었기에 어찌 그렇지 않으랴.
아낙들은 수확한 모시풀을 한 올씩 입술과 이빨을 사용하여 째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이(齒)에 골이 생긴다. 삶은 모시풀 속껍질을 벗겨 가늘게 실을 삼을 때 이빨로 한 올 한 올 추려내느라 앞니 사이에 골이 파이도록 힘든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골이 난다.”라는 말은 바로 모시풀을 째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거짓말에 이골이 나다, 공짜에 이골이 나다 등으로 ‘어떤 방면에 길이 들어서 아주 익숙해지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말이다. 이골 하니 저 마음 깊은 곳에서 묵직한 것이 올라와 눈에 깊게 밟혔다.
이골이 난다는 것은 단순히 땀을 흘리는 정도 가지고는 어림없다는 것, 여기에 이르자 평생 농군으로 살아온 부모님이 떠오른다. 분명 이골이 난 삶을 살아오셨을 텐데 그것을 몰랐다는 게 얼마나 송구한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이골이 난다는 것은 땀에 피까지 더해져서 ‘피땀을 흘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말하는 게 적확한 표현일 듯하다.
자연스럽게 난 ‘이골이 나는’ 삶을 한순간이라도 살아본 적이 있는지 돌아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적이 없는 것 같다. 이것저것 참견하고 아는 척하며 오지랖 넓게 살아왔지만 ‘이골’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으니 헛인생을 산 것 같아 씁쓸하다. 이골에 이르진 못했지만 지금부터 이골 정신이라도 삶에 녹여가며 살아야겠다는 때늦은 다짐을 해본다.
첨언하면 아낙들이 모시를 짤 때 2미터가 못 되는 낱실들의 실 가닥을 무릎에 올려놓고 비벼서 잇게 된다. 이러한 모시 잇는 작업은 쿠바 여인들이 담뱃잎을 허벅지에 올려놓고 돌돌 마는 장면과 흡사하다고 한다. 그래서 여인의 허벅지를 거쳐서 나온 쿠바의 시가(cigar)에서 우수한 향미가 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우리의 모시에서는 여인의 피땀어린 무엇이 느껴지려나.
잊혀진 모시에 이토록 깊은 삶의 의미와 가르침이 있다는 게 놀랍고 신기하다. 공짜심리가 팽배한 시대에 온갖 힘과 정성을 쏟는 ‘피땀어린 삶’의 가치가 스며있는 모시를 예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모시의 이웃인 한산의 앉은뱅이 술, 소곡주 한 잔이 땡기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