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판권 교수님] 자연, 나도바랭이
[강판권 교수님] 자연, 나도바랭이
by 강판권 교수님 2021.09.27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것을 지향하면서도 다른 존재를 인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더불어 살기가 어려운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무와 달리 풀과 함께 사는 데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 풀과 더불어 살기 어려운 것은 풀 자체를 생명체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풀을 생명체로 인식하지 않은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은 ‘잡초’이다. 잡초라는 단어는 생명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풀을 무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보다 키가 작고 정말 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밟아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 특히 전원생활을 누리는 사람들은 제초제를 뿌리지 않으면 풀과의 전쟁을 겪어야 한다. 풀 중에서도 바랭이(Digitaria ciliaris (Retz.) Koel.)는 전원생활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바랭이를 뽑고 돌아서면 다시 무성한 것이 바랭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랭이는 키가 작아서 손으로 제거하기도 쉽지 않다. 호미로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곧 살아난다. 그러나 볏과의 한해살이풀 바랭이는 농업시대에는 소의 먹이로 사용했다. 나도 어릴 적 소 꼴로 많이 제공했다. 게다가 전원생활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바랭이는 땅이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랭이 종류 중 나도바랭이(Chloris virgata Sw.)가 있다. 나도바랭이는 전 세계 열대와 아열대 지역에 분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해안가의 황무지나 길가에서 사는 귀화식물이다. 그런데 내가 사는 내륙에서도 나도바랭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우리나라의 기후가 변했다는 뜻이다.
나도바랭이는 바랭이와 꽤 다른 모습이지만 ‘나도’를 붙인 것을 보면 바랭이와 가깝다는 뜻이다. 나도바랭이는 바랭이와 잎과 꽃 모양이 다르다. 식물 이름에 ‘나도’를 붙인 사례는 나도밤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나도밤나무(Meliosma myriantha Siebold & Zucc.)를 들 수 있다. 나도밤나무는 참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너도밤나무(Fagus engleriana Seemen ex Diels)와 다른 종류지만, ‘밤나무’라는 공통점 때문에 상상을 자극한다.
세상에 불필요한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각각 존재의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체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취사 선택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이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나도바랭이’도 인간이 나도바랭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례에 속한다. 왜냐하면 바랭이라는 기존의 풀 이름에 단순히 ‘나도’라는 단어만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나도바랭이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걸핏하면 ‘더불어 삶’을 주장하지만, 더불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면 늘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우선 한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피상적인 이해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더불어 삶에 큰 장애 요인이기 때문이다. 나도바랭이를 포함한 식물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곧 자신을 이해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특히 나무와 달리 풀과 함께 사는 데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 풀과 더불어 살기 어려운 것은 풀 자체를 생명체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풀을 생명체로 인식하지 않은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은 ‘잡초’이다. 잡초라는 단어는 생명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풀을 무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보다 키가 작고 정말 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밟아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 특히 전원생활을 누리는 사람들은 제초제를 뿌리지 않으면 풀과의 전쟁을 겪어야 한다. 풀 중에서도 바랭이(Digitaria ciliaris (Retz.) Koel.)는 전원생활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바랭이를 뽑고 돌아서면 다시 무성한 것이 바랭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랭이는 키가 작아서 손으로 제거하기도 쉽지 않다. 호미로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곧 살아난다. 그러나 볏과의 한해살이풀 바랭이는 농업시대에는 소의 먹이로 사용했다. 나도 어릴 적 소 꼴로 많이 제공했다. 게다가 전원생활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바랭이는 땅이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랭이 종류 중 나도바랭이(Chloris virgata Sw.)가 있다. 나도바랭이는 전 세계 열대와 아열대 지역에 분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해안가의 황무지나 길가에서 사는 귀화식물이다. 그런데 내가 사는 내륙에서도 나도바랭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우리나라의 기후가 변했다는 뜻이다.
나도바랭이는 바랭이와 꽤 다른 모습이지만 ‘나도’를 붙인 것을 보면 바랭이와 가깝다는 뜻이다. 나도바랭이는 바랭이와 잎과 꽃 모양이 다르다. 식물 이름에 ‘나도’를 붙인 사례는 나도밤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나도밤나무(Meliosma myriantha Siebold & Zucc.)를 들 수 있다. 나도밤나무는 참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너도밤나무(Fagus engleriana Seemen ex Diels)와 다른 종류지만, ‘밤나무’라는 공통점 때문에 상상을 자극한다.
세상에 불필요한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각각 존재의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체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취사 선택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이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나도바랭이’도 인간이 나도바랭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례에 속한다. 왜냐하면 바랭이라는 기존의 풀 이름에 단순히 ‘나도’라는 단어만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나도바랭이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걸핏하면 ‘더불어 삶’을 주장하지만, 더불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면 늘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우선 한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피상적인 이해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더불어 삶에 큰 장애 요인이기 때문이다. 나도바랭이를 포함한 식물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곧 자신을 이해하는 중요한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