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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가듯

[한희철 목사님] 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가듯

by 한희철 목사님 2021.09.29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만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나이를 먹으면서 배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분명 처음 대하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고, 그 마음이 처음 들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던 일, 뒤늦게 나이를 먹으면서야 깨닫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삶이 우리를 가르치는 방법 중에는 뒤늦은 후회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일러주긴 일러주되 뒤늦게 후회하며 깨닫게 하는 방식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생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입니다.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코를 닦는 코흘리개 학생 말이지요.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삶이 공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신비라는 사실입니다. 따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도 많은 순간 우리는 삶을 공식이나 이론이라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것에 저것을 더하면 예상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에서 저것을 뺀 결과를 확신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예상했던 결과가 우리의 생각하고는 전혀 딴판일 때가 적지 않습니다.
열심히 사는데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도 결과가 초라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것일까, 눈물로 돌아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별로 애쓰지 않았는데도 일이 잘 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손수레를 끌고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갈 때 누군가 등 뒤에서 나를 밀어주기라도 하듯,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여겨지고 그 결과도 좋게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을 두고 우리 속담은 ‘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체’란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밭거나 거르는데 쓰는 도구였습니다. 그물이 드물었던 어린 시절에는 체를 들고 나가 개울에서 고기를 잡기도 했습니다. 동그란 체를 대고 고기를 몰면 미꾸라지나 새우 등이 걸려들었지요. 그 재미야 참으로 쏠쏠했지만 대개의 경우는 고기를 잡다 보면 체에는 구멍이 났고, 그러면 어머니께 된 꾸중을 맞아야 했습니다.
체를 많이 사용하던 시절에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다 헤어진 쳇불을 갈아 끼워 주거나, 어레미, 도드미, 생주체, 고운체 등 체를 파는 체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일상생활 속에서 체의 사용이 많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 술인 막걸리는 술이 익은 후에 술막지를 체로 걸러낸 후에야 먹을 수가 있습니다. 술이 알맞게 익어갈 무렵 술맛이 궁금하던 차에 때마침 술 거를 체를 파는 체 장수가 지나가니 일이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습니다. ‘술 익자 임 오신다’는 속담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일이 잘 맞아 돌아가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도 그만한 즐거움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추나무에 연 걸린 듯 사방 답답한 일들이 엉겨 있는 요즘에는 더욱더 그런 마음이 듭니다. 술이 익자 체 장수 지나가는, 술 익어갈 무렵에 임이 찾아오는 기가 막힌 즐거움이 답답한 마음에 숨구멍을 터 주는 일 말이지요. 삶은 공식이 아니라 신비, 이 또한 하늘이 주실 은혜이기에 가만히 두 손을 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