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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싸우지 않고도 지지 않는 법

[한희철 목사님] 싸우지 않고도 지지 않는 법

by 한희철 목사님 2021.10.13

자기가 자기의 성격이나 성품을 말하는 것은 객관적이기 어렵습니다. 우리 눈은 너무 먼 곳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너무 가까운 것도 보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내 성격이나 성품은 내 생각보다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훨씬 객관적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오랫동안 저를 알고 지낸 사람들이 저의 성격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온화하다, 조용하다, 욕심이 없다, 범생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투는 것을 싫어하고, 누군가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더없이 우습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초등학교 시절은 달랐습니다. 그 어린 시절 제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는 이기고 지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학년의 누군가가 나를 이기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때 입학을 하지 못해 나이가 한두 살이나 지나 입학을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한두 살 차이는 키와 덩치에 큰 차이를 보입니다. 같은 학년이지만 같은 학년이라 하기에는 덩치가 월등히 큰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래도 난 그들에게 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나와 맞서려고 하면 방과 후 만나 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 싸움은 상대방 입에서 “져!” 소리가 나야 끝이 나곤 했습니다. 코피가 나는 것도 하나의 기준이었지요. 혼자의 힘만으로 부족할 땐 친구의 힘을 빌리기도 했으니, 돌아보면 왜 그런 일에 집착했을까 웃음이 납니다.
그러던 중 큰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오는 아이였는데,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아이가 먼젓번 항복 선언을 뒤엎고 다시 도전을 해 온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와의 싸움은 점심시간 학교 후문 쪽 소나무 아래에서 벌어졌습니다. 구경하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점심시간을 끝내는 종이 울렸습니다.
구경하던 아이들은 우르르 교실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일이요, 졌다는 표시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뿔 맞댄 황소처럼 식식거리다가 결국은 달려 나온 선생님께 여지없이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주어진 결과로 보면 무승부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와 싸우려 했던 아이가 호주머니에 몰래 숨겨두었던 돌멩이를 선생님이 본 것이었습니다. 주머니에 숨긴 돌멩이, 그것은 내게 이미 진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주먹 한 대 오가지 않았고, 코피 한 방 터지지 않았지만 돌멩이를 감추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승부는 갈린 것이었으니까요.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이 시대의 단면을 극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정치인들 간에 오가는 거친 말과, 말과는 다른 행태를 보면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주먹질을 해야 싸우는 것도 아니고, 코피가 나야 승부가 갈리는 것도 아닙니다. 싸우지 않아도 이미 승부가 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제 어릴 적 기억만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