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내가 존재하는 이유
[권영상 작가님] 내가 존재하는 이유
by 권영상 작가님 2021.10.21
베란다에 십자매 두 마리가 산다.
언젠가 조롱의 문을 밀치고 십자매가 날아 나왔다. 저들도 놀랐는지 소란하게 울었다. 조롱 속에 갇혀 사는 새들로만 여겼는데 넓은 공간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모습에 나도 놀랐다. 그 후 그들은 심심하면 조롱에서 나와 난초 화분에 폴짝 앉고, 난초잎에 부리를 부비며 놀았다. 또 언젠가는 거실 텔레비전 위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언젠가는 베란다에 세워둔 플라스틱 빗자루의 비 모숨을 뽑아대고 있었고, 언젠가는 방석의 레이스를 풀어내고, 물통 곁에 떨어진 물을 콕콕 쪼아먹곤 했다.
조용히 그걸 지켜보는 일이란 즐겁다면 즐겁다. 소소하지만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기쁨이 잔잔하게 살아오르는 느낌을 그렇게 경험하곤 한다.
십자매가 우리 집에 온 지 벌써 7년째다.
애완종들이 다 그렇듯 이들의 일상 역시 그렇다. 누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하는 짓이 예쁘고, 그래서 휴식을 얻고 때로 행복감을 누리기도 하지만 성가시고 번거로운 대가도 뒤따른다.
십자매 말고 나를 번거롭게 하는 게 또 있다. 부겐빌리아 화분이다. 오래전, 인도의 어느 고성에서 보았던 인상이 남아 구한 화분이다. 담장을 타고 넘는 습성을 알고 베란다 난간에 내놓고 키운다. 몇 번인가 냉해를 입어 간신히 살려낸, 이제는 고목에 가까운 꽃나무다.
부겐빌리아는 진분홍 꽃이 좋다. 아파트 마당에서 올려다보아도 좋고, 집안에서 내다보아도 좋은 꽃이다. 일 년에 대여섯 번은 화사하게 핀다. 꽃, 꽃, 하지만 우리가 꽃이라 하는 부분은 실은 꽃이 아니고 작고 하얀 꽃을 둘러싸고 있는 포엽이다.
오래된 나무라 하루에 한두 번 물을 주지 않으면 금방 시든다. 그 때문에 일이 있어 집을 비우거나 멀리 여행을 갈 때면 근처에 사는 지인에게 집 키를 맡긴다.
“부겐빌리아 물 줬어? 십자매도?”
아내든 나든 집을 나가면 통화할 때마다 그것부터 묻는다.
“십자매를 숲으로 날려보내면 안 될까?”
나는 때로 불평하듯 아내에게 엉뚱한 소리를 한다.
십자매는 조롱 밖에 나와 넓은 베란다를 날아다녀본 경험이 있다. 화분의 풀잎도 쪼아 보고, 바닥에 떨어진 물도 쪼아먹곤 한다.
“유치원생 같은 새를 거친 세상으로 날려보내면 살까? 못 살지.”
내 심정을 아는 아내는 그때마다 나를 다독인다.
“십자매는 애가 분양받아온 거고, 부겐빌리아는 당신이 좋아 키운 거잖아!”
얘기는 언제나 그쯤에서 끝난다. 실은 답이 없다. 아는 이들에게 키워보라고 한때 권한 적도 있지만 선뜻 나서는 이도 없었다. 그러니 뭐 어쩌겠는가.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터 내가 달라졌다.
그들이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내가 보살펴주지 않으면 안 되는 돌봄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물 한 모금 모이 한 줌 내어주는 내 손의 고귀함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들에게 있어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됐다. 사소한 일이지만 그 사소함의 보이지 않는 곳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내 안에 숨어있는 기쁨이 때로 잔잔히 살아나온다.
언젠가 조롱의 문을 밀치고 십자매가 날아 나왔다. 저들도 놀랐는지 소란하게 울었다. 조롱 속에 갇혀 사는 새들로만 여겼는데 넓은 공간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모습에 나도 놀랐다. 그 후 그들은 심심하면 조롱에서 나와 난초 화분에 폴짝 앉고, 난초잎에 부리를 부비며 놀았다. 또 언젠가는 거실 텔레비전 위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언젠가는 베란다에 세워둔 플라스틱 빗자루의 비 모숨을 뽑아대고 있었고, 언젠가는 방석의 레이스를 풀어내고, 물통 곁에 떨어진 물을 콕콕 쪼아먹곤 했다.
조용히 그걸 지켜보는 일이란 즐겁다면 즐겁다. 소소하지만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기쁨이 잔잔하게 살아오르는 느낌을 그렇게 경험하곤 한다.
십자매가 우리 집에 온 지 벌써 7년째다.
애완종들이 다 그렇듯 이들의 일상 역시 그렇다. 누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하는 짓이 예쁘고, 그래서 휴식을 얻고 때로 행복감을 누리기도 하지만 성가시고 번거로운 대가도 뒤따른다.
십자매 말고 나를 번거롭게 하는 게 또 있다. 부겐빌리아 화분이다. 오래전, 인도의 어느 고성에서 보았던 인상이 남아 구한 화분이다. 담장을 타고 넘는 습성을 알고 베란다 난간에 내놓고 키운다. 몇 번인가 냉해를 입어 간신히 살려낸, 이제는 고목에 가까운 꽃나무다.
부겐빌리아는 진분홍 꽃이 좋다. 아파트 마당에서 올려다보아도 좋고, 집안에서 내다보아도 좋은 꽃이다. 일 년에 대여섯 번은 화사하게 핀다. 꽃, 꽃, 하지만 우리가 꽃이라 하는 부분은 실은 꽃이 아니고 작고 하얀 꽃을 둘러싸고 있는 포엽이다.
오래된 나무라 하루에 한두 번 물을 주지 않으면 금방 시든다. 그 때문에 일이 있어 집을 비우거나 멀리 여행을 갈 때면 근처에 사는 지인에게 집 키를 맡긴다.
“부겐빌리아 물 줬어? 십자매도?”
아내든 나든 집을 나가면 통화할 때마다 그것부터 묻는다.
“십자매를 숲으로 날려보내면 안 될까?”
나는 때로 불평하듯 아내에게 엉뚱한 소리를 한다.
십자매는 조롱 밖에 나와 넓은 베란다를 날아다녀본 경험이 있다. 화분의 풀잎도 쪼아 보고, 바닥에 떨어진 물도 쪼아먹곤 한다.
“유치원생 같은 새를 거친 세상으로 날려보내면 살까? 못 살지.”
내 심정을 아는 아내는 그때마다 나를 다독인다.
“십자매는 애가 분양받아온 거고, 부겐빌리아는 당신이 좋아 키운 거잖아!”
얘기는 언제나 그쯤에서 끝난다. 실은 답이 없다. 아는 이들에게 키워보라고 한때 권한 적도 있지만 선뜻 나서는 이도 없었다. 그러니 뭐 어쩌겠는가.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터 내가 달라졌다.
그들이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내가 보살펴주지 않으면 안 되는 돌봄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물 한 모금 모이 한 줌 내어주는 내 손의 고귀함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들에게 있어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됐다. 사소한 일이지만 그 사소함의 보이지 않는 곳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내 안에 숨어있는 기쁨이 때로 잔잔히 살아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