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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판권 교수님] 가을에서 가을까지

[강판권 교수님] 가을에서 가을까지

by 강판권 교수님 2021.10.26

가을은 가을이다. 가을은 겨울보다 앞서지도 않고 여름보다 뒤처지지도 않는다. 가을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가을은 언제나 가을답게 만드는 데만 목숨을 건다. 우리나라의 가을은 단풍 때문에 무척 아름답다. 갈잎나무들은 다음 해를 준비하기 위해 잎을 포기한다. 나무는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만들기 위해 잎을 만들지만, 가을의 끝자락에는 잎을 내려놓는다. 나무의 단풍은 나무가 성장을 멈추겠다는 신호이다. 전국의 단풍이 형형색색으로 나타나는 것은 나무들마다 성장을 멈추겠다는 신호가 다르기 때문이다.
단풍의 철학적 의미는 일시 멈춤이다. 멈춤은 쉼이 아니라 ‘동중정(動中靜)’ 혹은 ‘정중동(靜中動)’ 이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고요해야 하고, 고요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만 한다. 가을에 나무는 다음 해에 꽃, 잎, 열매를 만들기 위해 미련 없이 잎과 이별한다. 그래야만 이별의 끝에서 만남을 잉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별의 순간은 무척 고통스럽지만 새살은 언제나 고통의 자리에서 돋는다. 고통의 자리에서 돋은 새살이라야 한 생명체의 삶이 아름답다.
나는 경계를 사랑한다. 그래서 나무가 잠시 성장을 멈추고 잎을 떨어뜨리는 경계의 계절 가을이 좋다. 낙엽은 마음을 쓸쓸하게 하지만 쓸쓸한 마음 뒤 자리에는 언제나 온기가 묻어 있다. 낙엽은 차갑지만 나뭇잎이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누군가의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따스한 이불로 변한다. 단풍나뭇과의 단풍나무 한 이파리만으로도 누군가는 온몸을 숨기고 겨울을 보낼 수 있다. 그러니 낙엽 하나라도 함부로 불태우거나 밟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낙엽을 밟으면서 낭만을 노래하지만, 누군가는 사람의 발자국에 밟혀 목숨을 잃는다.
가을은 가을의 계절이다. 가을은 그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니, 단풍의 계절이니, 독서의 계절이니 하면서 가을을 만만히 대한다. 사람은 가을이 가을의 계절을 맞는데 그 어떤 힘도 보태지 않으면서도 함부로 가을을 평가한다. 가을을 가을 입장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가을 앞에 고개 숙일 것이다. 더욱이 가을은 한순간도 가을을 떠난 적 없는데도 금세 사람들은 몇 장의 사진을 남긴 채 가을과 이별한다. 이별 후에는 겨울을 맞느라 가을은 안중에도 없다.
가을은 추(秋)하다. 추는 거북이가 잡히는 계절이다. 사람들은 거북을 잡아 등에 불을 대어서 갈라지는 것을 보고 앞날을 점쳤다. 거북이 잡히는 계절은 곡식이 익는다. 들판에 벼들이 고개를 숙이면 하늘은 한층 높다. 나를 낮추면 하늘처럼 높아진다. 높은데 오르면 하늘은 낮다. 하늘이 낮으면 인간은 오만하고, 하늘이 높으면 사람은 겸손하다. 인간이 겸손하면 가을 하늘은 높다. 높은 하늘을 우러러보면 사람의 가슴은 넓어진다. 텅 빈 논바닥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면 가을은 가을답다. 가을에서 가을까지만 보낼 수 있다면, 나에서 나까지 그리워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처럼 스스로 처음과 끝을 만들 수 있어야 행복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