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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집보다 비싼 이웃

[한희철 목사님] 집보다 비싼 이웃

by 한희철 목사님 2021.11.03

오래전에 ‘집’이라는 짤막한 동화를 쓴 적이 있습니다. 택시 기사로 20년을 성실하게 일해서 내 집을 장만한 가장 이야기였습니다. 사글세와 전세를 전전하던 끝에 넓진 않아도 아파트를 내 집으로 갖게 되었으니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그런지 꼭 두 달 만의 일입니다. 갑자기 그가 깊은 회의에 빠지고 맙니다. 도무지 일할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음이 허탈하여 운전을 시작하고부터는 싹 끊었던 술에도 입을 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좋던 내 집에도 들어가기가 싫었고요.
왜 그랬을까요? 사기를 당한 것도, 자식들이 재산 문제로 다툼을 벌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엉뚱한 곳에 있었습니다. 새로 산 아파트가 두 달 만에 두 배로 오른 것이었습니다. 내 집이 두 달 만에 배로 올랐다면 좋아할 일이지 왜 힘들어했느냐고요? 그런 이유로 동화는 ‘그러기에 난 그 아저씨를 만나면 이런 희한한 아저씨도 있구나, 허리가 부러져라 한껏 껴안아 드릴 작정입니다.’로 끝냈답니다.
새로 생겨나는 신조어 속에는 그 말이 생겨날 때의 세태가 담깁니다. 그런 점에서 ‘영끌’이라는 말은 서글픔을 넘어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뛰어오르는 아파트값을 보면서 더 미루다가는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젊은 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모아 집을 장만하는 현상을 반영한 말이었습니다. ‘영끌’이라는 말은 ‘영혼까지 끌어모아’라는 뜻이었으니 말이지요.
갈수록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더 늦지 않게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일이 되었으니,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영혼까지 끌어모아야 하다니, 도대체 우리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싶어 마음이 처연해집니다.
마음이 점점 쓸쓸해지고 어두워가는 이 시절, 등불 하나를 밝혀 내걸고 싶은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세 닢 주고 집 사고 천 냥 주고 이웃 산다’는 속담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위는 아니지만, 자료를 찾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1냥(兩)=10전(錢)=100푼(닢)’이었습니다. 한 닢과 한 냥의 차이는 100배가 됩니다. 그렇게 계산을 하면 속담 속에 담긴 ‘세 닢’과 ‘천 냥’의 차이는 훨씬 더 벌어지게 됩니다.
세 닢과 천 냥은 느낌만으로도 엄청난 차이로 다가옵니다. 세 닢은 마른 풀처럼 마냥 가볍게 여겨지고, 천 냥은 헤아리기 힘들 만큼 묵중한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우리 속담은 세 닢 주고 집을 사고, 천 냥을 주고 이웃을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집과 이웃을 어찌 값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만 굳이 비교한다면 세 닢과 천 냥처럼 까마득한 차이라고, 그만큼 이웃이 더 소중한 것이라고 일러줍니다.
속담은 그리 말하지만 돌아보면 오늘날에는 거꾸로 되었습니다.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천 냥을 주고 집을 사지만, 이웃의 가치는 세 닢보다도 헐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천 냥짜리 집을 가지고 있으면 무얼 하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세 닢으로 여긴다면 결국 우리는 모두 세 닢짜리 인생이 되고 말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