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이미지

오피니언

오피니언

[한희철 목사님] 가짜 용서

[한희철 목사님] 가짜 용서

by 한희철 목사님 2021.12.22

‘용서’라는 말은 그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문장이 조금 어색하다 싶으면서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용서를 빌다’와 ‘용서하다’라는 말 사이의 괴리감을 느낄 때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빌다’와 ‘용서하다’의 거리는 참으로 아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그 거리를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이들이 코 푼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듯 용서라는 말만 사용하면 당연하게 용서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잘못은 ‘잘하지 못한 것’이며, 미안(未安)한 것은 ‘편하게 하지 못한 것’이라는 이해는 재미있고도 의미 있게 여겨집니다. 살다 보면 잘하지 못한 일들이 생기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누구에게 그런 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필요한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일이 필요하고, 용서를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당연해 보이는 용서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容恕’라는 한자는 용서의 의미를 곰곰 돌아보게 합니다. 容恕는 ‘얼굴 용’(容)과 ‘용서할 서’(恕)가 합해진 말입니다. ‘容’자는 ‘宀’(집 면)과 ‘谷’(골 곡)이 합해진 모습입니다. 갑골문에 나온 容자를 보면 ‘內’(안 내)에 항아리가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容자는 ‘보관하다’ ‘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恕’자는 ‘如’(같을 여)와 ‘心’(마음 심)이 합해진 모습입니다. 마음이 같아진다는 것은 거리감을 지우거나 분노의 마음을 내려놓을 때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恕자가 ‘용서하다’ ‘동정하다’ ‘인자하다’라는 뜻을 갖게 된 까닭이지요.
恕라는 글자 하나가 갖는 무게를 돌아보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스승께 물었습니다. “평생 지켜야 할 신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제자의 질문에 공자가 대답한 말이 서(恕)였습니다.
영화로 널리 알려진 <밀양>의 원작은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입니다. ‘용서’에 대해 그리도 진지하게 고민한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벌레 이야기>는 용서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무엇보다도 잘못된 용서, 가짜 용서에 대해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면회를 다녀온 엄마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자신의 용서를 필요로 할 줄 알았던 살인범이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며 평안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었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냐며 엄마는 절규합니다.
통과의례처럼 너무 쉽게 말하는 용서라는 말에는 진정성이 담기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 생각하는 모습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한없는 가벼움입니다. 그 가벼움은 잘못의 무거움과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먼지 털 듯 용서라는 말 한마디로 허물을 지워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부터 버리는 것, 그것이 용서로 가는 첫걸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