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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이날치를 오마주한 이날치

[이규섭 시인님] 이날치를 오마주한 이날치

by 이규섭 시인님 2022.01.14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長林) 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전동 같은 앞다리/ 동아 같은 뒷발로/ 양 귀 찢어지고/ 쇠낫 같은 발톱으로 잔디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 흩치며/ 주홍 입 쩍 벌리고/ 워리렁 허는 소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래(자라) 정신없이 목을 움츠리고/가만히 엎졌겄다…’ <하략>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 노랫말이다. 수궁전에서 토끼를 데리러 육지에 온 자라(거북이)가 호랑이를 잘못 불러 소동이 벌어진 장면이다. 이날치 밴드는 전통적인 판소리에 현대적인 팝 스타일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음악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뮤지션이다. 유튜브로 ‘범 내려온다’를 들으면 신바람 나는 판소리에 경쾌한 팝과 펑크의 절묘한 조화로 어깨가 들썩여진다.
특히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와의 합동 영상은 반바지와 포졸 차림, 양복에 장군 모자 등 코믹한 의상에 웃음이 절로 난다. 이날치 밴드 음악에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춤사위를 입힌 한국관광공사의 홍보영상은 유튜브에서 3억 뷰를 기록하는 빅 히트다. 판소리와 국악이 현대 실용음악의 새로운 동력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사례다.
이날치 밴드는 19세기 판소리 서편제 이날치 명창을 오마주한 보컬이다. 오마주는 존경하는 사람의 업적이나 재능에 대한 경의를 표해 스타일이나 분위기를 따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날치(李捺致ㆍ1820~1892) 명창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본명은 경숙(敬淑). 젊어서는 줄타기를 잘해 날치와 같이 날쌔게 줄을 탄다고 하여 날치라는 이름을 얻었다. 소리꾼의 북장단을 치는 고수로 활동하다가 판소리에 뜻을 두고 서편제의 대가 박유전 문하에 들어가 수제자가 됐다. 쉰 목소리와 같은 컬컬하게 나오는 소리인 수리성에 풍부한 성량으로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소리꾼으로 이름을 떨쳐 조선후기 8명창 반열에 올랐다.
1994년 판소리 답사기행을 취재하면서 소리꾼 이날치의 발자취를 더듬었던 기억이 새롭다. 옛 소리꾼들은 광대로 천대받으며 소리의 혼을 키워냈다. 이날치는 머슴 출신이다. 창평면 유천리에서 태어나 해곡리 얼그실 마을 집강(執綱ㆍ면장) 유한기 집에서 어려서부터 일을 했다. 어깨너머로 한문과 풍수지리를 깨우칠 정도로 영특했다.
이날치는 유 씨의 총애를 받으며 한양과 장성 등지로 심부름을 다니다가 우연히 창(唱) 하는 곳에 들러 광대들의 줄타기와 판소리를 처음 접하고 예인의 꿈을 키웠다.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 청소년수련원 초입에 세워놓은 이날치 기념비 비문에는 수북면에서 태어난 것으로 잘못 기록돼 있다.
이날치의 아들은 소리꾼에 대한 천대가 싫어 타관인 부여로 이사가 살았다. 소리의 맥은 증손녀 이일주 명창으로 이어졌다. 취재 당시 58세이던 이 명창은 올해 86세로 현재 판소리 ‘심청가’ 전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다. 판소리의 현대화와 대중화도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판소리의 원형은 전승되어야 할 가치다.